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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꽃과 자귀꽃

2017.07.2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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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롱꽃과 자귀꽃

    정목일(수필가)





팔월이면 여름의 막바지이고, 일년으로 말하자면 계절은 성숙과 성장의 호르몬이 자르르 흐르고 얼굴엔 어느새 청년의 열기로 가득 차있다. 열기와 젊음이 충만하면 오히려 제 풀에 지치게 된다. 나무 잎새의 빛깔도 푸르딩딩해져 초록을 보는 것도 무덤덤하다. 뜨거운 뙤약볕에 만물이 축 늘어져 맥을 못 추는 여름철엔 꽃들도 눈길을 받기 어렵다

사방이 녹색이어서 지치는 여름에는 분홍빛의무궁화와 더불어 배롱꽃, 자귀꽃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름 꽃이 아닌가 한다. 창원시가지에서도 철월이면 배롱꽃이 피어나 9월이 다 가도록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해준다. 이 나무는 부처꽃과(科)의낙엽 소교목이며 중국이 원산이다. 백 일간이나 핀다하여 '목백일홍'으로 불리우며 홍자색과 흰꽃을 피운다. 나무껍질이 사람의 살결 같기 때문에 '간즈름나무'라고도 하며,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었을 때 잎이 움직인다고도 한다.

남쪽지방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해온 배롱나무는 재실, 산소 등에 많이 심어져서 어느덧 그런 곳에서만 보이는 꽃으로만 인식돼 온 것인데, 근래엔 도시의 가로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봄철과는 달리 탐탁한 꽃도 없는 무료한 여름 날에 시민들의 눈을 씻어주기 위해 이 꽃을 심어놓은 것이다. 창원의 중심도로엔 칠월부터 배롱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여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배롱꽃을 무덤 근처에 심는 것으로만 알아, 도심 속에 피워놓은 것에 대하여 납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가을이면단풍으로 채색되건만, 여름이면 산소는 녹색 속에 파묻히고 말아 허전하기 짝이 없다. 초록 속에 백 일간이나 홍차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관상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염천으로 인한 나태와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무덤에서 깨어나 도시로 나온 꽃을 배롱꽃이 아닌가. 창원의 여름은 배롱꽃이 피어 더욱 청신해지고 운치를 느끼게 한다.

무덥고 답답하기조차 한 농촌의 여름, 어느새 초록빛으로 변해버린 산야에 눈을 황홀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꽃이 있다. 나뭇가지에 분홍빛 깃털로 만든 작은 우산을 펼친 듯한 꽃들이 초롱처럼 매달려 있다.

나른한 여름 한낮에, 속눈썹이 긴 소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듯한 신비로운 꽃과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자귀꽃을 바라보면 사춘기 때 소녀와 눈맞춤을 하던 순간이 되고 만다. 나이도 잊어버리고 분홍빛 여정이 무들어옴을 느낀다. 속눈썹이 이마에 닿아오는 듯하고 눈동자는 물오른 속삭임으로 깜박거린다.

자귀꽃은 생김새가 퍽 이색적이다. 꽃받침과 화관은 얕게 5개로 갈라지고 녹색이 돌지만, 수술은 길게 밖으로 뻗어나 분홍색을 띈다. 자귀나무 꽃이 분홍색으로 보이는 것은 수술의 빛깔 때문이다. 여느 꽃들에선 꽃의 빛깔이 뚜렷하지만 자귀나무 꽃은 수십 개의 수술이 모여 분홍빛깔을 이루기 때문에 투명한 분홍이고 빛을 투과하여 빛을 뿜어내는 듯하다. 나무 한 그루에 수 천개 분홍 촛불을 켜놓은 것은 아닐까. 호주에서 붉은 빛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불꽃나무를 인상깊게 본 적이 있는데, 자귀나무 꽃보다 정열적이긴 하였으나 신비롭지는 않았다.

수많은 꽃들을 보아왔지만, 자귀나무 꽃처럼 신기로운 꽃을 보진 못하였다. 우리나라 산야에 이처럼 황홀하고 눈부신 꽃이 있다는 걸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자귀꽃은 섬세하고 부드럽다.

수십개의 분홍 수술로 우산처럼 펼쳐진 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비단실로 만든 듯하다. 강렬한 여름의 뙤약볕이 아니라, 다사롭고 은근하며 무언지 속삭여줄 듯한 햇살의 감촉이다. 꽃의 빛깔과 향기는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고 은은하다. 자귀꽃은 처음으로 얼굴에 크림을 발라 본 열 여섯 살 소녀의 살 내음을 풍긴다. 꽃을 코에 갖다대면 자극적이거나 향기가 없는 듯한 것과는 달리 상큼하고 은은하며 부드럽고 깊은 맛이 있다. 이것은 순수와 밝음에서 풍겨오는 향기일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아련한 그리움의 향기를 띄고 있어서 무미건조하지 않다.

자귀꽃은 밤이면 조용히 꽃잎을 오므려 버린다. 꽃의 분홍빛 수술은 분을 바르는 붓털보다 더 부드럽고 섬세하다. 미세한 마음의 감촉까지도 느껴질 듯하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섬세한 꽃이 자귀꽃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지쳐서 숨을 몰아 쉬는 한 여름에 자귀꽃이 피어 이토록 부드러움과 신비로움을 선물해주고 있음은 여름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이룰 수 없는 꿈이 될지 알 수 없어도 정원이 있는 집을 갖게 된다면, 자귀꽃을 맞아드리고 싶다. 자귀꽃으로 여름을 가장 부드럽고 은은한 빛깔과 향기로 채우고 싶다. 삶이 새로워지고 순수에의 설렘이 생기고 아름다운 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다. 분홍빛 촛불들을 나무 가지마다 초롱초롱 매달아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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