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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길

2017.02.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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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길
작가들이 어깨를 펴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삶의 환경이 되길

   

              ▲ 정목일 수필가


근래에 두 문인이 걸어간 길을 보았다. 한국 최초의 문학서를 남긴 신라시대 혜초 스님과 굶어 죽은 작가로 신문에 난 최고은 작가이다. 


 

2010년 12월 18일부터 2011년 4월 3일까지 국립박물관에서 '실크로드와 둔황' 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의 꽃은 사상 처음으로 공개된 혜초(慧超: 704-787)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었다. 필자는 『왕오천축국전』을 친견(親見)하고, 혜초가 걸어간 실크로드를 바라보았다. 세 권 중 전시된 1권 두루마리 필사본에 총 227행으로 5693자가 적혀 있다. 당시로선 여행 중에 종이 두루마리에 붓으로 답사현장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용이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실크로드』라는 기행수필집을 낸 바 있다. 1천3백년 전에 고비사막을 넘어 인도까지 내왕했던 선각자 혜초의 발자취를 보았다. 혜초는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 풍습 등을 알려 주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김으로써, 한국 최초의 문인이요, 탐험가, 구도자, 번역가의 존재를 알린 사람이다. 실크로드는 당시 동양의 중심인 중국 서안과 서양의 중심인 로마 간의 무역로를 일컫는 말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인, 모험가, 구도자, 지식인, 군인, 야심가들이 이 길을 드나들었다. 

필자는 2006년 둔황의 막고굴 17호 석굴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곳은 프랑스인 파울 펠리오(1876~1945)에 의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이다. 허물어질 듯한 어두컴컴한 굴 속에서 손전등 불빛을 비춰 가며 일부분의 벽화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고, 『왕오천축국전』이 사라진 공간엔 공허감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 문학서이고 문학의 시발이기도 한 이 책은 1천3백년 만에 저자의 고국 땅을 찾아왔지만,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60cm만 펼쳐 놓아 아쉬움이 컸다. 국민들은 전시 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찾아와 경의를 표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혜초는 고향인 신라에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서 숨졌지만, 『왕오천축국전』의 귀향을 무척이나 반겼을 것이다. 이 두루마리 필사본과 한국인의 만남은 시공을 초월하는 문학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사람 '굶어 죽은 작가'로 보도된 고 최고은(시나리오작가: 1979~2011)의 길을 생각한다. 유럽의 신문에서 OECD회원국이자 주요 수출국의 하나인 한국에서 '굶어 죽은 작가'가 있다는 뉴스는 큰 충격이었다. 최고은 작가의 경우는 지병이 있었던 정황으로 보아 죽음의 원인이 아사(餓死)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이웃집 문에 붙여 놓은 쪽지 글에서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있을까요.'라는 구명의 외마디를 남긴 점을 보아 삶의 극한점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작가가 왜 이런 극한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일까. 작가를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간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의 우리 사회안전망을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절대로 그냥 묵과돼선 안된다. 한국문학의 암담한 현실을 극명하게 말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인들 중 극소수인 5% 내외만이 창작 활동을 통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현실을 당국이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곧잘 '문화시대' '한류바람' 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문인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과 대책은 극히 미흡한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부족하다. 상품을 제조하여 수출을 통해 삶을 도모하고 있다.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경쟁력은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이런 상상력과 창의력을 제공하는 바탕이 문학이다. 문학의 퇴색과 시듦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는 곧 수출전략에 적신호임을 알려준다. 점차 낮아지는 독서율과 출생률에 국가 장래가 달려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문인이 굶어 죽고, 책이 팔리지 않는 풍토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나라의 앞날을 망치는 일과 다름없다. 미래를 향한 경쟁력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작가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고독과 질병과 우울과 기아로 말미암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창백한 작가의 삶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일은 한 작가의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것인가? 오늘에 처한 대부분 작가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무한의 경쟁력이며 미래를 꽃피울 에너지원이다. 전국의 도서관을 확충하고, 우수한 작가의 작품집을 구입함으로써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준다든지, 기업 메세나 운동과 상관하여 1기업 1인 작가 지원의 문화풍토 조성 등 검토해 볼 좋은 시책과 방법이 있을 것으로 본다. 

문인의 길은 험난하다. 목숨을 걸고 걸어간 한국 최초의 문인 혜초와 현대의 최고은 작가에게서 문인의 길을 본다. 작가는 현실의 벽을 넘어 보다 풍요로운 창조의 길을 모색해 나가는 존재이다. 문인은 자신만의 이기와 영달을 위한 삶을 추구하지 않고, 창작을 통한 인류의 삶과 이상을 꽃피워 나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선각자나 구도자의 길을 걷는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굶어 죽는 문인'이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 이런 국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긴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 국회에 계류 중인 '예술인복지법'이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여야가 손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도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작가들이 어깨를 펴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삶의 환경이 됐으면 한다.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격(國格)에 어울리는 작가 지원책이 요청된다. 

문인의 길은 고독하고 험난하지만, 붓과 종이 두루마리를 지니고 창조의 길로 떠나야 하는 존재이다.

■ 정목일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월간문학 2011년 6월호(권두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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