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3 21:38
숭례문 현판 글씨 누가 썼나?
2008년 2월11일 오전 1시55분. 국보 1호 숭례문(崇
禮門)이 불타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숭례문의 편액(扁額·현판 글씨)은 그 전에 보존할 수 있었다.
숭례문 현판은 10일 오후 11시10분 화재 진압에 나선 두 명의 소방관들에 의해 떼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약간의 파손이
있었지만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숭례문의 심장과 혼을 불길 속에서 구해낸 것이다.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
이제(1394∼1462)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것. 하지만 이는 다수설일
뿐,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작자를 밝히는 낙관이 현판 전면에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양녕대군 외에도 신장, 안평대군, 정난종, 유진동 등이 숭례문 현판 글씨의 작자로 거론돼 왔다.
최근 출간된 '죽당 유진동'(유근영·유동희 지음)에서 저자들은 숭례문 편액을 둘러싼 그간의 주장들을 총정리하고 있다.
각 주장의 요지와 근거를 살펴보자.
◆ 양녕대군설 = 숭례문의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의 작품임을 처음 거론한 이는 이수광(1563~1628)이다.
그는 광해군 6년(1614)에 펴낸 '지봉유설'에서 숭례문의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의 작품이라고 적었다.
그 구체적 근거는 대고 있지 않지만 이수광이 태종의 후손인 만큼 집안에서 전해 온 바를 적은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또 '승정원일기' 영조 12년(1736) 6월12일자에도 양녕대군이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썼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어 고종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 에도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세간에서 남대문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기록들에 의거, 양녕대군설이 다수설로 자리잡고 있지만 다른 이가 작자라는 이설(異說)도 끊임없이 주장돼 왔다.
◆ 신장설 =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오래 역임한 인물로,
초서와 행서에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장이 숭례문 현판을 썼다고 주장한 이는 추사 김정희다.
추사는 그의 문집 '완당선생집'에 실린 '홍우연에게 써서 주다'라는 제목의 서간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인데
깊이 뼛속에까지 치고 들어갔고…"라고 적고 있다.
김정희는 숭례문 현판 글씨에 관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의 대가다.
그는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명은 없다.
하
지만 1961~1963년 숭례문을 해체, 중건할 때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이 입회한 가운데
현판의 뒷면을
문질러보니 신장의 이름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이야기가 사진 등 확고한 물증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데다 창건 당시에 신장이 썼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보는 글씨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반박도 제기된다.
◆ 안평대군설 = 조선
전기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안평대군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의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갈 정도였다.
따라서 중국 사신이 도성에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숭례문의 현판을 안평대군이 썼을 것이라는 추론도 유력하다.
숭
례문은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 3년 뒤인 태조 7년(1398)에 완공됐다.
처음 완공됐을 당시 신장은 과거에
합격하기도 전이었고, 양녕대군의 나이는 불과 다섯 살이었다.
이때의 현판은 신장도 양녕대군도 아닌 다른 사람이 썼을 것이다.
숭례문은 세종 29년(1447)에 거의 새로 짓다시피 했다.
위치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다 바뀐 마당에 현판 글씨도 새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즉 숭례문을 헐 당시의 편액이 신장 또는 양녕대군의 글씨였다고 하더라도
재건립하면서 안평대군의 글씨로 바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숭례문이 다시 세워진 2년 뒤인 세종 32년(1450), 동활자(銅活字)인 경오자(庚午字)를 주조하면서
안평대군의 글씨를 바탕으로 한 사실도 안평대군설을 뒷받침하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 정난종설 = 숭례문 편액의
주인공으로 정난종(1433~1489)을 주장한 이는 실학자 이규경(1788~?)이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인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사고'에서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다. …
글씨를 잘 써 어명에 따라 비판(碑版)과 종명(鐘銘)을
많이 썼다.
숭례문의 편액 역시 공(정난종)이 썼다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 자체를 보아도 공의 서체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규경은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검서관이 돼 박물학자의 길을 걸은 인물로
그의
주장을 흘려버릴 수는 없다.
정난종은 세조, 성종대에 성임과 더불어 당대 쌍벽을 이룬 일류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특히 조맹부체에 뛰어났다.
숭례문 편액은 조맹부체의 영향이 강한 서체로 평가되고 있다.
◆
유진동설 = 유진동(1497~1561) 역시 신장, 양녕대군, 안평대군, 정난종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유진동과 숭례문 현판 글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조 23년(1799) 대제학 홍양호(1724~1802)가 지은
유진동의
'시장(諡狀·임금에게 죽은 이의 공적을 밝혀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글)'에
"필법에 옛 뜻이 담겨 있으며 숭례문의 현판 글씨도
공이 쓴 것이라고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은 고종 8년(1871) 12월에 펴낸 '임하필기'에서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
대감이 윤성진 대감과 함께
문루에 올라가 판각을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고 한다"고 적었다.
이유원은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 다시 쓴 것인가 싶다"고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말하자면,
양녕대군이 쓴 것이
화재로 손상돼 유진동이 고쳐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모든 기록들을 존중한다면 신장이 먼저 쓴 것을,
양녕대군 혹은 안평대군이 고쳐 써 달았고 또 다시 세월이 지난 뒤 정난종, 유진동이 새로 고쳐 썼다는 추리가 가능하다"며
"유진동 설을 받아들이면 거론되는 선대의 모든 이들이 현판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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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불의 산(火山)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였다.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보면 서체가 장중하면서도 단아하다. 힘이 넘치고 아름답다. 이것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내용출처 : 1998/04/07일자 동아일보 기사
흥인지문
1397년(태조6 년) 4월 완공된 흥인문은 성을 쌓을 때부터 지형이 낮고 습해서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다져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땅을 높이고 지세를 보(補)하고자 산맥 형상의 ‘지(之)’ 자를 넣었고,
일부러 두 줄로 썼다고 합니다.
또한, 흥인문은 ‘동대문(動大門)’이었다는 얘기도 전하며,
정사가 어지러웠던 광해군 말년에는 북서쪽으로 기울었고,
임오군란 때는 남동쪽으로 기울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인터넷 자료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