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7 18:09
미인도(美人圖)의 화가
정 목 일
ㄱ씨는 미인(美人)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갓 스무 살 될까 말까 한 아리따운 미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여 시외의 조그마한 집에 살고 있어도 항상 얼굴에 미소가 흐르는 것은 아마 미인과 함께 지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ㄱ씨의 댁을 방문하였을 때는 유월 초순경이었다. 그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나를 맞이했다. 화실은 아래 체의 방과 그 곁에 붙은 헛간을 헐어 넓힌 것으로 종이·먹·물감 등 화구(畵具)들이 놓여 있었다.
내가 그를 방문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가 숨겨 놓은 미인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수줍음마저 타는 사람이어서 이쪽에서 능동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먼저 의사 표시를 하는 법이 없었다. 남에게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낭패감 같은 것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뻔히 예상하고 있었건만, 일부러 모른 체하고 그의 곁에 앉았다.
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방바닥엔 놀랍게도 너무나 곱고 아리따운 미인이 누워 있지 않은가! 참빗으로 곱게 빗은 머릿결은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가늘고 부드러운 눈매는 맑고 은근하여서 눈마저 황홀해지는 듯했다.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간 듯한 눈매, 낮지도 오뚝하지도 않은 코, 희고 부드러운 손엔 피리가 들려져 있었다. 연지 빛 입술로 피리를 불고 있었다. 조용히 움직이는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피리 소리가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한 옥색 치마저고리의 부드러운 선(線)엔 여인의 숨소리가 흐르고, 옷에선 향긋한 채취가 풍기고 있었다. 난향(蘭香)일 듯싶었다.
그는 40여 년간 미인도를 그려 왔다. 주위에서 진부한 소재를 버리지 못한다는 핀잔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보다 더 어여쁜 미인을 그려 보고 싶은 욕심만은 버릴 수가 없었다. 미인도를 그릴 때는 욕정을 느낀다고 한다. 처음에 목탄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미인을 스케치하고 이를 다시 천에 옮겨 붓으로 선을 살린 다음, 마음에 들면 채색에 들어가게 된다. 알몸을 그려 놓고 그 위에 옷을 입히며 화장을 시키는 순서로 미인도를 그려 가는 동안, 그는 미인과 열애에 빠져 든다고 한다.
‘아,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미인도의 여인들은 조금이라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인가?’
ㄱ씨가 나를 돌아보며 탄식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미인도를 그리는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여인상을 구체화 시켜 보는 행위가 아닐지 모른다. 미인도를 통해 지순한 사랑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미인도를 그릴 때는 순수하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리는 미인과 사랑을 나누려면 거짓으로 붓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미인도의 미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애정이 담기지 않은 미인도란 인형을 그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애정만이 생명을 깃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각기 생각하는 미인의 조건이 있을 것이고 미인관(美人觀)이 있게 마련이다. ㄱ씨는 속으로부터 미소와 정숙함이 우러나오는 여인에게 애정을 느낀다고 한다. 마음이 맑으면 얼굴도 맑고. 마음이 고우면 얼굴도 곱지 않겠느냐, 생각하며 그린다고 한다.
현대에는 불행히도 자신이 찾는 미인이 없어서 언제나 미인도의 인물은 한복 차림에 비녀를 꽂은 고전적 여인이다. ㄱ씨는 고전적인 미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게 살고 있긴 하지만, 미인과 함께 살고 있는 그를 보면 부럽기만 하다. 비록 몸은 늙어간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미인을 그리며 살아간다는 것도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싶다.
ㄱ씨의 댁을 물러나오며 나는 방바닥에 조용히 누워 있던 미인도의 그 여인에게 미안스러움을 느꼈다. ㄱ씨와의 열애를 훼방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ㄱ씨 댁에서 본, 그 온화하고 맑은 그리움을 지닌 고전적 미인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미인이 부는 피리소리가 아직도 은은히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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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자.
피리를 불면 美人圖의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겠지.
화가가 입혀준 옷을 훌훌 벗고, 나신의 육체로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추겠지.
누군가 넋 나간듯... 여인을 바라보면 한마리 황학이 되어 구름을 타고....
다시는 화가의 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나는 목향의 <미인도의 화가>를 읽으며 옛 중국의 당나라 시대 < 최현 >이 쓴 칠언고시를
떠올린다.
외상으로 마신 술값 대신 주막의 벽에 오랜지 껍질을 문질러 그려 준 황학(黃鶴)
주막의 손님들이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면 황학도 같이 춤을 추었다는 고사를 떠올린다.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만금의 돈을 모두어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훗날 화가가 돌아와 주막에서 피리를 부니 황학도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며
벽에서 나와 구름을 타고 훌훌 하늘을 올라 갔다는 그런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