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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길에서 만난 스승

2015.10.12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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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길에서 만난 스승

                                                                                              鄭 木 日

 

나는 1975<월간문학>지 수필부문 최초 당선과 1976<현대문학>지에 수필부문 최초 추천을 완료하면서 수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때의 나이가 서른이었다. 당시 데뷔 시인, 소설가의 나이가 대략 20대여서 늦게 출발선에 선 셈이다. 수필장르를 택해 문학의 길을 나선다는 것은 앞이 막막했고, 눈여겨 볼 사람도 없었다. 종합문예지 첫 등단자로서의 자부심은커녕 수필의 길도 뚜렷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서른 나이의 청년은 어느새 고희를 넘어서게 되었다. 수필 40여년의 길을 걸어 왔지만, 아직 수필의 경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수필 40년의 길을 걸어오면서 은혜로운 일은 하늘이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주신 인연이다.

 

경봉선사(鏡峰禪師.1892~1982)와는 딱 한 번 친견(親見)하고 삼배(三拜)를 올린 인연이지만, 마음속에서 그 분의 음성이 들려와 잊혀 지지 않는다. ‘산부처로 불교도들의 숭앙을 받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통도사 극락암에 계셨을 때였다. 처음으로 친견한 자리에서 그분은 물었다.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무심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마음속에 길이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얼굴이 타는 듯 붉어짐을 느꼈다. 그분은 팔순 노인이셨고, 나는 30대 후반이었다. “모르겠습니다.”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그 후 프랑스의 철학가이자 문학가인 레비스트로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통도사 극락암을 찾아 경봉선사와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일이 있었다. 경봉선사의 물음이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봉선사의 질문은 오직 하나였다.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그 질문은 결국 경봉선사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오로지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암자에서 40여 년 참선수도를 했으며, 일생을 걸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과 존재에 대한 풀리지 않는 마지막 질문이었다. 경봉선사는 한 번 만남과 질문으로 인생 길이란 화두를 주셨다. 그 질문이 천둥처럼 울려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로 하여금 언제나 자문자답(自問自答)하게 만든다.

 

수필가 피천득(1910~2007) 선생은 세 번 절을 올려 스승으로 섬기던 분이셨다. ‘현대문학지에 추천된 수필가들이 모여 현대문학수필작가회를 만들어 처음으로 동인지를 내었다. 조촐한 출판기념자리에 수필계의 원로 몇 분을 초빙하였다. 피천득 선생을 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초대장을 보내긴 했으나, 금아 선생은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참석한 일이 없다고 했다. 어찌된 일인지 피천득 선생이 참석하셨다. 어렵게 부탁드린 격려사를 하실 때,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이런 자리에 나온 적이 없지만, 정목일수필가를 만나보려고 왔습니다. 저서에 서명을 하여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마산에서 서울로 가 금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 댁 거실에서 세 번 절을 올리고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인사를 드렸다. 해마다 두세 번 스승을 찾아뵙고 수필과 삶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 해 가을, 댁을 방문하였을 적에 난 이미 절필하였지만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 쓰시오.”라는 말을 남기셨다. 금아 선생처럼 살 수는 없지만, 언제나 고결, 청초, 개결한 풍도와 격조 높은 인생 미학을 꽃 피운 삶과 수필을 우러러 본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文信.1923~1986) 선생과는 신문사 문화부 기자 신분으로 각별히 교류해온 분이셨다. 문신 씨는 40대 이후 언제나 깨끗한 속내의와 잠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창작에 열중하게 되면, 모든 정신력을 한데 모아 쏟아 넣음으로써 잠들 때는 기진맥진한 상태이고, 이대로 숨이 멈출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자신의 숨진 모습을 남이 보았을 때, 깨끗한 옷차림을 보이고 싶다는 의식에서 언제나 잠자리에 들 때는 새 옷을 갈아입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문신 선생의 좌우명(座右銘)을 떠올리며 문학도로서의 자세를 가다듬곤 한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 같이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조각가 문신 선생의 좌우명을 외워보면 가슴이 떨려오고 삶이 엄숙해진다. 조각가로서 창작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자 했던 열정이 뜨겁게 전해온다. 수필을 쓰는 나에게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선구자’ ‘그리움등 국민 가곡을 남기신 작곡가 조두남(1912~1084) 선생은 생전에 자주 찾아뵙던 원로 예술인이셨다.

불멸의 국민 가곡을 남긴 작곡가 조두남(趙斗南) 선생과의 만남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분께서 타계하시기 전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그분 댁을 방문했다. 마산만이 바라다 보이는 아파트 거실에 달빛이 밀려와 있었고 오랜 투병생활로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그분은 앙상한 얼굴에 웃음을 띄고 두 손을 잡으며 맞아주셨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 깊게 패인 두 눈에는 외로움과 어떤 간절함이 뒤섞인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은 운명하셨다. 어느 날, 조두남 선생의 수제자로 한국음악협회 경남지회장인 작곡가 김봉천 씨가 찾아와 악보를 보여주었다.

조두남 선생의 유작(遺作)입니다.”

유작곡(遺作曲) 악보에는 고별의 노래라는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그 분은 벌써부터 모두와의 고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악보를 보며,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고 고별의 노래에 가사를 붙이게 됐다.

 

잊을 수 없는 네 분 스승은 배움이 부족한 나에게 인생길을 가르쳐 주셨다. 경봉선사는 자문자답하며 얻는 깨달음의 길을, 피천득 선생은 청자연적 같은 수필의 길을, 조각가 문신 선생은 예술가의 땀과 열정을, 작곡가 조두남 선생은 고별의 노래까지 작곡해 두고 눈을 감으실 정도로 창작에 철저하셨다. 수필을 써오면서 네 분의 스승을 생각하며, 나의 삶과 인생길을 돌아보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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