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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를 통해본 명량해전과 이순신

진고 49회 윤 신현 


1. 서두 


한국기업으로 미국에 진출하여 업계내 최고가 되기를 목표로 노력하기를 십수년, 성과는 미미하고 육신은 예전같지 아니하고 갈길은 먼데 날은 저문 격으로 초조하다. 고객을 잘 모르니 좋은 제품 못나오고 좋은 인재 못구하고 미국사람 잘 모르니 배운 용병술이 쓸모없다. 작은 나라에서 큰돈이라 여긴 것도 현지에서 비교해 보면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으로 수백 배 쟁쟁한 기업들과 경쟁하여 이름을 보존하고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어찌 이것이 오늘 나만의 문제이겠는가? 성공을 꿈꾸고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숙명처럼 제기되는 문제이리라. 누가 속시원하게 답해주면 좋으련만, 얻는 것은 적고 세월만 흐르니 답답함만 더해간다. 고전에서 지혜를 찾는다는 격으로 과거의 인물 중 어려움을 이기고 최고의 성과를 창출한 인물을 찾다가 이순신을 만났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진정한 이순신의 모습은 간과하고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만 각색하여 미화함 으로써 보통 범인들이 처한 현실문제 해결에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의 성과 중 가장 탁월하다고 판단되는 명량 해전을 선택, 그가 직접 쓴 난중일기를 통해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고 성과를 창출하게 되었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동문 중 최고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거나 어려운 시기가 있을 때 이순신의 교훈이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문지식도 없이 두서없는 글이지만 넓은 이해를 바란다. 


2. 암울한 시기, 백의 종군 


a. 원균에 대한 원망과 시대에 대한 한탄. 


1597년 음력 1월27일 체포 압송되어 4개 죄목으로 국문을 받고 백의 종군 신분으로 4월 1일 옥문을 나서나 모친상을 당하고 6월 4일 합천 권율의 원수부에 도착한다. 고문으로 육신은 병들고 마음은 피폐하여 그의 일기에는 분함과 원망, 적개심, 시대를 잘못 태어난 신세한탄이 4-5월 난중일기에 알알이 배여있다. 


이순신은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원균의 음모에 있다고 단정, 원균에 대한 깊은 원망과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다. 통제사 원균이 서신으로 문상하자 이순신은 5월 7일자 일기에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모친)조상하니, 이것은 원수(권율)의 명령이었다” 라고 적을 만큼 원균에 대한 불신을 내뱉고 있다. 이런 불신은 원균에 대해 이전에는 원수나 원공이란 호칭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시점 에서는 원균, 원가, 도적, 흉적, 음흉한 자등으로 바뀌고 원균의 하는 일마다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신세를 한탄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고 자신의 심정을 슬프고 비통하고 외롭고 그립고 눈물만 난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순신 개인에게 가장 암울한 절망의 시기였다. 


b.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인 일에 매진한다. 


원수부에서 보여주는 이순신의 행적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부딪혀 나가려는 이순신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침에 둘째 아들 ‘울’의 이름을 열(悅)로 고쳤다. 싹이 처음 튼다거나 초목이 기운차게 자란다 는 뜻으로 쓰는 글자이니 그 뜻이 매우 좋다” ( 5월3일) 


백의 종군 이순신에게 내려진 업무는 성을 보수하거나 말을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여러 종류의 군사 일에 적극적으로 자문을 하기도 했다. 또 백의종군시 동행한 부하나 하인이 모두 13명이었는데 조정에서 4명의 하인과 말 2필에 대한 식량과 물품만을 지급하였지만 어렵다고 돌려보내지 않고 무우 밭을 경작하거나 여기저기서 식량을 꾸고 조달하여 자급자족의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자기 혼자에 의존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본댁과 첩댁 가족들을 위해 안부도 전하고 식량을 구해 보내기도 하는 등 가족 대소사를 챙기는 모습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c. 암울한 시기를 통해 새로운 리더쉽을 형성하다.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에 따라 7월로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평상심를 회복한다. 7월7일자 일기에  “꿈에 원공과 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내가 원공 위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공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라고 기록. 막말 대신 깍듯한 존칭을 붙여 자신의 평상심 회복을 보여주고 있다. 


실패와 좌절의 시기를 맞아 이순신이 보여주는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백의 종군 이전의 이순신은 엄격한 규율,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 전술, 소신을 굽히지 않는 신념의 소유자로 다소 독재형의 리더쉽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백의 종군 이후에는 솔선수범, 고도의 인내, 불굴의 정신, 포용력과 겸양의 미덕, 전략 전술의 유연성 등이 가미된 리더쉽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삭관 탈직, 백의 종군의 어려운 시기를 맞아 좌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얻어진 것으로 이후 전개될 명량해전을 성공케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3. 칠천량 해전과 조선 수군의 전멸 


a. 선조의 오판과 무지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 조선은 다시 전장에 휩싸인다. 명나라 육군이 군말없이 참전, 조명 연합군을 형성하였음에도 우위에 서지 못하자 선조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수군을 활용, 전세를 뒤집을 전략을 구상한다. 이순신을 백의 종군으로 실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고 조선 수군의 역량을 총집결, 일본 육군의 보급기지이자 본영인 부산공략을 명령 한다. 명령을 잘 따를 줄로 생각했던 원균이 수륙합동 작전을 핑계로 미적거리자 수군 단독 공격을 재천명하고 김식을 독전관으로 파견, 원균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기에 이르렀고 마지 못한 원균이 부산 공격을 감행한다. 초기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시, 육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지만 수군은 크고 작은 해전에서 승승장구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를 보면 승리의 원인을 조선 함포의 우수성, 견후 장대한 판옥선의 이점, 조선수군의 용맹성등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선조는 이를 진실로 믿고 조선 수군이 천하무적으로 지휘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승리할 수 있다는 자만감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 임진 초기 해전과 일본 조선 전력을 분석해 보면, 조선 수군이 강한 게 아니라 이순신 한 사람의 역량이 특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쟁 경험이 없는 선조는 이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일본 침략을 전제로 동래와 거제에 경상 좌우수사를 배치하였고 여수와 명량에 전라 좌우수사를 배치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기록이 불분명하여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이 초기 거느린 판옥선이 23척, 이억기가 24척인 것을 감안하고 일본의 주 공격도가 부산인 점을 감안했을 시 경상 좌우수영에는 적어도 각75여척의 판옥선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에 전선은 격침되고 달랑 6척을 거느린 경상우수사 원균이 노량까지 밀려와 전라 좌수영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보면 조선 수군의 역량이 일본 수군에 비해 월등하다고 볼 수가 없다. 또 이순신을 제외한 어떤 수군 대장도 대등한 일본 수군을 만나 승리를 쟁취한 기록이 없다. 


1차 해전 당시의 피아 전력 비교를 보면 일본이 10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은 3도 연합수군을 형성하였음에도 판옥선 기준 50여척에 지나지 않아 총체 전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러함에도 이순신이 연전 연승한 것은 조선수군의 장점을 최대로 취하고 적의 약점만을 공략하는 전략 전술을 자유롭게 펼쳤기 때문인데 이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b. 사면초가에 빠진 원균 


왕명에 의해 부산공격의 압력을 받은 원균은 전쟁준비나 전략 개발에 집중하지 않고 차일피일 세월을 보낸다. 실제 통제사의 지위에 올라 일본 수군을 분석해 보니 부산 공격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이에 대안으로 조정에 수륙 연합작전을 올리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6월 17일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고 있다. 권율에게 갔더니 권율은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말하고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여준다.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안골의 적을 무찌른 후에 수군이 부산등지로 진군하겠으니 안골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고,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지 않고 오직 안골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만 말하며 “여러 수군 장수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다른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 라고 했다.(6월17일) 


원균은 왕명의 독촉을 받고 이를 모면하기 위하여 수륙연합을 주장하지만, 이는 결국 일을 지연시키려는 노림수에 불과하며 아직도 조직을 장악하지 못하고 그 잘못을 육군에 뒤집어 세우려는 흉계라고 권율은 생각했다. 이에 권율은 조정에 보고하고 원균의 수륙연합은 부산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직접 세수사를 독촉해 진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조정에서도 안골의 적은 경솔히 들어가서 칠 것이 못된다고 판단, 권율을 지지했다. 왕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침내 독전관 김식을 보내 감시하고 상전인 권율이나 이원익도 원균을 정직하지 못한 장군으로 매도하고 부하 장수들도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등 모든 점들이 원균에게 불리했다. 


c. 무모한 출동 


준비도 없이 전략전술도 없이 강요에 떠밀려 7월5일 한산도를 출발한 판옥선 기준 134척의 조선 수군은 칠천량 외줄포에서 밤을 보내고 6일 거제를 지나 옥포에 도착, 밤을 보내고 7일 새벽 출발, 부산 입구 절영도에 도착하니 저문 저녘이었다. 어두워지면서 강풍이 불고 전함 20여척이 표류되고 그 일부는 서생포에 표류, 가토 키요마사군에게 참살당한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밤새워 후퇴, 8일 정오 가석도에 도착하니 지치고 목마른 군사들이 상륙했다가 매복된 일본군에게 400여명이 희생된다. 급히 수습, 밤새워 서쪽으로 후퇴하니 9일 새벽 칠천량 외줄포에 도착한다. 


권율은 즉각 소환명령을 내려 곤양으로 원균을 불러 패전 책임을 추궁하고 즉각 재공격을 엄명하니 원균은 공격도 아니고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진영으로 칠천량 외줄포에서 고민으로 시간만 보내다가 7월 15일 밤,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d. 절치 부심하고 인내하는 일본군, 마침내 승리를 얻다. 


그러면 일본 수군은 어떠한가? 임진년 초기 해전에서 연전 연패한 일본 수군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제해권을 뺏기 위해 절치 부심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 최대 강점은 함포에 있고 이 함포전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판옥선이고, 판옥선이 최고의 효율을 얻기 위해서는 일자진, 학익진과 같은 전술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이 전술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이순신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 대책수립에 골몰하던중 마침내 정유재란이 발발,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간계가 적중, 이순신 실각이라는 쾌거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의견이 채택되어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5개월이라는 장기간을 인내하고 있었다. 마침내 7월 5일 조선 수군이 부산을 향해 출동하고 일본 수군 수뇌부는 전력파악과 약점파악을 위해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한다. 7월7일 조선 수군이 절영도에 나타났지만, 일본 수군은 굳게 지키는 원칙을 고수하고 제 풀에 지친 조선수군이 후퇴하면서 노출시킨 약점을 하나 하나 분석한다. 


강풍에 20여척이 표류하고 그 일부가 가토군에게 참살당했다는 보고와 가덕에 매복된 병사들에게 4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보고는 조선수군의 내부에 심상치 않은 약점이 있음을 간파했다. 또 한산도로 회군하지 않고 외줄포에서 소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일본 수뇌부는 수비위주에서 대규모 공세로 전환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은 제거 되었지만 함포와 판옥선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경시할 수가 없었다. 


수적인 우세를 활용하기 위해 토도, 와키자카, 가토요시아키등이 모두 참전하는 연합함대를 형성하여 함대 수가 1000여척에 이르렀고, 이 함대를 야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이동시켜 조선 수군을 외곽에서부터 3-4겹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조선 함포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야간 전투로 결정하고 진을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습전을 전개 하기로 결정,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운명의 결전 당일 7월15일. 칠천량 외줄포에 정박하고 있는 조선 수군을 포위한 채, 밤 12시경 5-6척의 소형 쾌속선을 침투시켜 조선 수군의 대응 능력을 감지한다. 작은 배가 판옥선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고, 조선 수군은 경계도 없이 허둥지둥 혼란에 빠졌다. 우왕좌왕하는 조선 수군을 지켜보면서 일본 수군은 끝없이 인내하고, 마침내 조선 수군이 잠에 떨어진 새벽 4시경, 일본 연합수군은 총공격을 감행한다. 일방적으로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은 7월 16일 오후까지 외롭게 대항하다가 한 척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몰하고, 통제사 원균은 섬으로 도주하다가 적병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조선 수군 지휘부가 전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수군은 이어 한산도 통제영을 접수한 뒤 회군, 17일 승전 연회를 개최하고 육군 위주의 전략에서 수륙 병진 전략을 채택, 7월 29일 수군함대가 출동하게 된다. 


4. 패전 수습과 대책 


a. 도원수 권율의 고민 


칠천량 패전 보고는 권율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원균이 수륙 연합작전을 펼쳐 안골포의 일본군을 몰아낸다면 부산 공격이 가능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를 부산 공격지연 변명으로 간주, 수군 대장들을 독려, 억지로 부산 공격에 임하게 했고 또 실패하여 돌아왔을때, 책임을 추궁하고 재공격을 감행케 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패전 책임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물론 부산 공격은 왕명이었고 안골포 공격은 좋지 않다는 조정의 지시도 받았기 때문에 책임은 면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패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무책임과 무능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능한 해군 대장은 모두 전사하고 우수사 배설과 백의 종군 이순신 정도가 남아 있어 권율의 선택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배설은 전 함대가 전멸했는 데도 휘하12척을 고스란히 보존한 점은 결국 도망이나 탈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벗어날수 없었고, 만약 탈영이라면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더불어 논의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권율은 즉시 이순신을 지목하고 대책수립의 전권을 부여한다.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밤기습으로 통제사 원균이 이억기,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통골이 퍼짐은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라고 하면서 오후 10시경까지 이야기 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라고 말했더니 곧 원수는 그 이상 더 좋아할 수가 없었다. (7월 18일) 


상급자가 당연히 사람을 시켜 하급자를 부르면 될 것을 권율은 아침 일찍 이순신을 방문하고 자기로서는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으니 이순신이 나서야 한다고 한껏 자신을 낮춘다. 신분과 상황이 여의치 못한 이순신이 주저함을 보이고 권율은 수십 시간을 할애, 열성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이순신을 움직이게 하였다. 권율은 이순신을 위해 9명의 부하를 내놓고 이순신은 즉시 현장을 향해 출발한다. 일련의 행동들은 권율이 이 패전으로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었는 지를 잘 보여준다. 


b. 난국을 주도할 기회를 맞다 


권율로서는 왕명에 의해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을 왕명 없이 대책수립 책임자로 지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순신이 자신의 능력을 믿고 패전의 책임을 논했다면 이순신에게 대책을 의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수군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어도, 일체 의견은 내지 않았고 마침내 권율이 제 발로 찾아와 몸을 낮추고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던 것이다. 또한, 일을 맡으면서도 현장 확인을 한 후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하면서 계획을 말하지 않고 자기 위주의 상황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주도 면밀하게 처신했다. 만약 이순신이 방책을 이야기하고 움지이지 않았다면, 권율은 수십 번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고 이순신의 복귀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이순신에게 수군 재건의 중책이 내려졌고 권율은 이순신의 역량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백의종군으로 평생을 살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올 것을 예감한 이순신은 실로 영민하게 움직이고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다. 혹시 지체하면 권율의 마음이 바뀔 지 모르기에 밤 10시가 지났는데도 9명의 군관들과 함께 길을 떠나 초계에서 멀지않은 상가에 도착하여 밤을 세우는 것은 얼마나 그가 이 기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가를 보여준다. 그 때의 심정은 마치 그물을 벗어난 고기의 심정과 같았으리라 여겨진다. 


19일 단성, 20일 진주를 지나 21일 노량에 도착, 패하던 정황을 조사한다. 22일 우수사 배설을 면담하고, 23일 조사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 권율 원수부에 보내고 자신은 조정의 결정을 기다린다. 


c. 이순신의 대안 


이순신이 7월23일 원수부에 보낸 보고서는 별다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패전은 사실이었고 12척의 배만이 온전하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패전 원인은 여러가지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이었고 정작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우수사 배설이 전의를 상실하고, 공포증에 걸려 있는 점, 전함과 190여명이 필요한데 현재 90여명 밖에 없는 점, 식량부족으로 전함 수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는 점, 함포용 화약과 화살등이 부족한 상태라고 적고 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보고서를 자세히 보면 이순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승전한 일본 수군은 반드시 한두 달 안에 남해, 서해를 지나 한성으로 진군할 것으로 내다 보고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제압을 위해 조선 수군의 재건이 아닌 현재 가지고 있는 12척을 활용, 일본 수군의 서진을 좌절시키는 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실현 가능성을 높혔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12척의 함대 정비와 부족한 인원 1200여명을 보충, 한 두달 지내면서 한 달의 전투를 소화할 식량과 무기 확보 후에 유능한 리더가 좋은 길목을 잡아 한판 승부를 벌려 적함대의 서진을 제지한 다음 장기적으로 조선 수군을 재건 해야 한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각이었다. 적은 함대로 대함대에 타격을 주려면 리더의 역활이 더욱 커지는데 이순신은 우수사 배설이 적임자가 아님을 누누이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4. 복직과 전투준비 


a. 선조의 딜레마 


7월16일 패전 소식은 17일 도원수 권율에게, 18일 이순신에게, 21일경 조정에 알려진다. 조정은 경악하지만 사태 해결의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문신 위주의 조정은 수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고 패전에 대한 정보가 부족, 어느 정도에서 수습을 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하였고 책임론이나 누구를 수군대장으로 세워야 하는가 정도가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7월 22일, 선조가 독전관으로 원균에게 파견되었던 환관 김식이 살아 돌아와 칠천량 해전의 경위를 소상히 아뢰고 원균과 장수들의 전사 소식을 재차 확인한다. 


선조는 김식의 보고를 토대로 향후 대책에 고민한다. 이순신을 백의 종군으로 실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 부산 공격을 집요하게 주장한 사람이 선조 자신이었기 때문에 책임론이나 패전 경위에 대한 논의가 길어질수록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고 이순신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들의 입을 막기 위해 선조는 결단을 내려 전격적으로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 


23일, 이순신이 패전 대책보고서를 작성하는 날, 선조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보기 드문 장문의 교서를 작성하고 이 교서는 8월 3일 이순신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선조의 이 결정은 이순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시적 타개책에 불과했고 일주일도 안돼 이순신에게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배속하라는 교지를 내리고 8월 7일 이순신은 교지를 접수하고 고민에 빠진다. 또 원균 임명에 대한 책임론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할 때, 30여명의 무신에게는 선무공신을 200여명의 문신과 환관들에게는 호성공신을 책정하면서 선무 1등 공신에 권율, 이순신, 원균을 선정,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 힘쓴다.


b. 영웅인가 겁쟁이인가? 불분명한 배설 


누가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많은 뛰어난 수군 장수가 칠천량 패전으로 사라짐으로 경상 우수사 배설만이 휘하 전함을 온전히 보존 . 향후 조선 수군 재건에 초석이 될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배설은 원균이 이순신과의 불화로 충청병사로 옮기자 경상 수사로 승진하였고 칠천량 해전에도 참가했다. 부산공격에 실패하고 돌아온 원균이 외줄포에서 공격도 아니고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진형으로 허송하자 적 대군이 침입하면 막을 길이 없다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칠천량 해전 당시 밤12시, 소형 일본 태선 4-5척이 침입,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울 때 전함 12척을 지휘하여 현장을 탈출. 7월 16일 한산도 통제영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사람을 피신시키고 파괴시킨 뒤 경상도와 전라도 접점인 노량까지 후퇴, 패전을 수습하고 있었다. 배설의 행동을 두고 구국을 위한 결단이라는 평가와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 함대를 이탈한 겁장이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의심어린 눈으로 보는 쪽에서는 적의 기세에 밀려 도망올 수는 있지만 다른 전함이 전몰했는데 휘하 전함12척을 온전하게 보존한 것은 결국 동료를 저버리고 탈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조선 수군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이 도망하는 12척을 좌시한 것도 새벽4시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 때문이지, 배설이 신출귀몰 함대를 운영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만약 의심이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범죄로 처리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이나 권율 등 간부 무장들은 배설을 신뢰하지 않았다. 반면 조정은 배설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유보했고, 배설은 우수사직을 유지했다. 이순신의 일기에는 배설은 겁장이, 도망자다. 건방진 태도의 장수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순신과 배설사이의 갈등의 골은 메워 질 수 없었고 마침내 9월2일 새벽, 배설은 도망을 택하고 종전 2년 후 잡혀 참형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c. 수군폐지론과 이순신의 자신감 


조정은 마침내 이순신을 통제사로 선택했다. 8월3일 임명장을 받고 일을 하고 있는데 8월 7일경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수군세력이 미약하니 역할이 있을 수 없는 바 육군에 귀속하라는 교지를 받는다.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고 마음 씀씀이가 고약하다. 이순신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마침내 8월 12일 장계를 작성하여 14일 올린다. 어떤 황당한 일을 당해도 심사숙고하고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는 이순신의 장점이 드러난다. 임금의 교지라면 명령과 같다. 잘못 어겼다가는 역적의 누명을 쓸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보잘것 없는 신에게는 아직 전선이 12척이나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비록 적기는 하나 신이 죽지않는 한 왜적은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충무공 전서) 


확신에 찬 이순신의 장계로 수군폐지론은 유야무야된다. 


d. 한판 승부를 위한 전쟁 준비 


일본 수군의 남해 및 서해 제해권 석권을 저지하기 위한 이순신의 계획은 간단 명료했다. 잔존 12척의 전함이 가장 빠른 시간안에 운영될 수 있도록 1200명의 인원, 보급 물자, 무기등을 준비하는 것과 적을 맞아 싸울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조정과 선조는 정보에 어둡고 실정을 몰라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였지만 군사나 보급, 무기지원에서 전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8월3일 임명장을 받자마자 이순신은 즉각 움직였다. 12척의 배가 노량 근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군영 후미로 옮기도록 지시하고 본인은 9명의 군관들과 함께 구례, 곡성, 옥구, 순천, 삭단, 보성 등지를 돌며 인원과 식량 무기 확보에 집중한다. 칠천량 승전에 고무된 일본 육군은 1차 전쟁 때 발을 디디지 못했던 전라도를 침입, 마침내 관문인 남원성을 8월16일 깨뜨리고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순신이 돈 읍성들은 적진영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는데 보름동안 330km 를 돌며 한판 승부를 준비했다. 다행인 것은 일본군 침입으로 피난민이 대거 발생, 우왕좌왕 갈 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람 구하기가 수월하였고 또 조선육군이 채택한 청야작전이 신통치 않아 많은 물자와 무기가 소각되어야 함에도 도망가기에 바빠 고스란히 남아 생각보다 빨리 준비를 마칠수 있었다. 


6. 벽파진 전투 


a. 마침내 12척의 전함을 인수하다. 


8월18일 회령포에 도착하고, 19일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 앞에서 숭배하는 데 배설은 받들어 숭배하지 않았다. 건방진 태도가 차마 말할 수 없기에 형리를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 (8월19일) 그러나 기존의 병사들은 전쟁공포증으로 자신감을 잃어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고 절반 이상이 해전과 수군의 일에 문외한이라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 이순신은 함대를 이동, 이진으로 진을 옮긴다. 4일을 머물다가 24일 어란진으로 옮기고 다시 4일을 머물다가 29일 진도 동쪽의 중앙에 있는 벽파진으로 이동한다. 적이 몰려온 것도 아니고 적은 동쪽 바다에 있는데 왜 이순신은 자꾸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일까? 적을 겁내어서 도망간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고, 이순신도 별 수 없을 것이라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고, 작전상 후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적의 역량을 충분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또 급조된 조직이 오합지졸 수준으로 정예 일본 함대를 감당할 수 없는 바 전투훈련을 위한 시간이 절실했다. 또한 소수의 함대로 다수의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좁은 해협과 같은 지리적 도움이 필요한데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명량을 염두에 두고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b. 고육지책으로 실전을 통하여 군사를 훈련한다. 


인계된 12척과 전라 좌수영 1척을 합해 13척의 판옥선을 거느린 이순신 함대의 전력은 미미하였다. 7월29일 대선단을 조직, 출동한 일본 수군은 8월26일 이순신이6일 전에 머물렀던 이진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침내 8월28일 8척의 적선이 조선 수군을 어란진에서 공격한다. 


“적선 8척이 갑자기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려 하고 경상 수사 배설도 달아나려고 했다.” (8월28일) 


이에 이순신이 앞장 서 공격하자 적선 8척은 물러갔고 갈두까지 쫒다가 돌아온다. 첫 교우전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수군 전투력의 약점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고작 8척의 적함에 갈팡질팡하였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순신은 아직 해전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단정. 다음 날 29일, 진도의 벽파진으로 다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조우전이 소득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일본 전함도 조선 수군이 강하게 대항하자 도망가는 것을 본 병사들은 일본 수군도 별 것 아니다 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에 경외감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병법과 지식을 앞세우지만 성과 없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수사 배설의 입지를 어렵게 하였고 마침내 9월2일 새벽, 배설은 탈영을 감행한다. 


두번째 교전은 9월 7일 이루어졌다. 척후군관 임준형이 적선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당도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은 오후 4시경, 전 함대를 몰아 적이 머물고 있는 어란진을 공격한다. 놀란 적은 곧바로 도망쳤고 먼바다까지 쫓아갔지만 빠른 일본 전함을 따라 잡지는 못하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제까지 서쪽으로 후퇴만 하던 이순신이 처음으로 동진하며 적선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보를 분석한 이순신은 적함대의 규모가 200여척이며 그 중 55대의 전위함대가 선발대로 앞서 움직이고 이 선발대의 일부가 탐색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일본 수군은 쫓겨온 8척의 보고를 접하면서 아연 긴장했다. 어느 정도의 전력을 가졌는지 파악이 필요한 시점에서 다시 13척의 척후 선양을 파견, 조선 수군의 전력 파악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13척의 임무가 전투가 아니라 척후인 만큼 수군이 공격하면 반드시 도망갈 것이라고 확신, 출전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순신은 병사들의 실전 능력을 높이고 싸우면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60여리의 먼 거리를 이동했던 것이다. 또한 적선은 물러갔지만 조선 수군의 전력을 탐지할 것으로 판단, 야간 기습을 대비케 했다. 이순신이 앞장서 포를 쏘니 적군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 


c. 벽파진인가? 명량해협인가? 


세번의 교전을 통해 피아간의 전력이 노출되었고 일본 수군은 8월9일 2척의 빠른 배를 보내 조선수군의 전력을 재확인 했다. 일본수군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다고는 하나 실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잘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서진하고 있었다. 한산도 본영을 궤멸시켰지만 알 수가 없었고 7월29일 출발한 200여척의 함대는 8월 26일 이진에 접근했고, 9월 7일 선발대가 어란진에 도착, 조선 수군과 교전을 가졌고 9월14일 본대가 합류, 60여리 떨어진 벽파진 조선 수군과 대치했다. 


조선 전함은 13척으로 확인되었지만 수군대장이 초기 전쟁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일본 수군의 사기는 저하된다. 병법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량해협이야 말로 소수의 함대로 다수의 적선을 처리할 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지형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수군은 결국 이순신이 명량해협에서 해전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량에서 5km떨어진 벽파진에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실제 대함대가 벽파진 포구를 장악하면 그야말로 독안의 쥐가 되는 신세인데 이순신은 보름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수군이 공격하면 반드시 이동할 것으로 예상, 20여척으로 기습 공격을 해봤지만 이순신은 꼼짝하지 않고 벽파진을 지켰다. 


이순신은 왜 명량이 아닌 벽파진에 진을 친 것일까? 실제 이순신은 일본수군 함대를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명량해협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명량이 아무리 천연의 험지라 해도 적이 알고 대책을 세우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만약 조선 수군이 명량에 진을 치고 신중한 일본 수군 장수가 일본 전함을 진도 남쪽으로 돌아 공격하면 조선 수군은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되니 그야말로 명량해협이 무덤이 된다. 그러나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으면 왜적은 세력을 두 곳으로 나누어 공략하지 않고 적을 가볍게 보고 공격한다. 또한 다행히 적선이 한 곳으로 몰려 공격을 결정할 시 벽파진을 경유하는 경우와 직접 바로 명량을 도모하는 경우, 약 1시간의 시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시점이 낮 1시인 점을 감안하고 적군이 머무는 어란진이 60리인 점을 감안할 시 1시간의 시간 차이는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이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일본 수군은 어란진에 머물수 밖에 없었고 결국 공격을 위하여 3-4시간 힘을 뺀 뒤 전투에 임해야 하는 불리함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의 마음은 명량에 있으면서 진을 벽파진에 두어 일본 수군이 유리하게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좁게 만들고 있었다. 


7. 명량 해전 


a. 벽파진에서 명량으로 함대를 이동하다. 


9월14일, 적선 55척이 어란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올라 왔고 왜적에 사로 잡혔다가 탈출한 김중절의 말도 전했다. 말인즉 조선 전함 10여척에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즉시 공격하고 경성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사숙고한 이순신은 적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느끼고 우수영 피난민들을 육지로 대피하게 한다. 


언제 함대를 이동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서둘러 이동하면 적은 전략수립의 선택이 많아지고 늦었다간 대 함대의 포위를 당하게 되어 살길이 없다. 마침내 15일 밤, 다음날 일본 대함대의 공격을 확신하고 명량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했다. 


b. 일본 수군의 벽파진 공격 


일본수군은 이순신이 명량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보름 동안 움직이지 않는 조선 수군을 마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마침내 9월 16일 아침, 벽파진의 조선수군을 향해 출동한다. 60여리를 항해하여 벽파진에 다다르니 조선 수군은 거짓말같이 사라지고 없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지만 전력 차이가 너무 두드러져 문제시 되지 않았다. 수뇌부가 모여 회합하고 조선 수군이 명량쪽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해협으로 이동했다. 실제 작전이 실패하면 신중해야 하는데 역전의 용장으로 포진된 지휘부는 명량이 격전지가 될 것으로 예상, 만반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데 자신이 있었고 또한 조선수군이 13척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자만감에 들떠 냉정한 판단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막연하게 이순신의 계략에 빠져든다고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공격을 결정했다. 명량해협은 길이가 1500m정도되는 해협으로 진도와 대륙 사이에 있다. 조류는 오전 7시와 오후 7시경 남해안 쪽에서 서해안 쪽으로 흐르고 밤1시와 낮1시경, 서해안 쪽에서 남해안 쪽으로 흐른다. 폭이 500m내외지만 바위가 나와 있어 배가 다닐 수 있는 폭은 400m에 불과했고 특히 해협 중앙의 울돌목은 바위가 양 옆에서 튀어나와 배가 다닐 수 있는 폭이 120m에 불과했다. 일본 지휘부는 명량해협과 유사한 지역에서 자란 해적 출신 미찌우사를 선봉으로 삼고 200여 함대 중 대형선을 제외한 133척으로 함대를 편성, 명량 해협에 진입시켰다. 


c. 완벽한 승리, 명량해전 


적은 이순신이 도모하고 바라던 대로 명량해협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순신은 즉각 출동, 명량해협 끝자락 우수영 앞바다에 일자진을 형성하고 속속 물살을 타고 울돌목을 넘어오는 적선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다른 배들은 겁을 먹고 진군하지 않아 물살에 떠밀려 멀어져 갔다.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환과 화살을 풍우같이 마구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이 진군하지 않아 사태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배를 돌아다보니 이미 일마장 가량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 했다 ” .(9월16일) 


그렇게 연습하고 명령을 내렸지만 조선 수군은 일본 대함대의 위엄에 겁을 집어먹고 도주하고,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순신은 단호하게 전진한다. 일자진을 형성, 즐겨쓰는 함포전으로 싸우고자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이순신이 탄 대장선만이 고군분투하지만 위태롭기 그지없다. 일자진과 함포전을 예상한 일본 수군은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넓게 포진하였고 조선 수군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었다. 울돌목의 물살은 서너배 빠르다. 통과하면 갑자기 유속이 느려져 자연스럽게 앞의 전함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옆으로, 옆으로 배 방향을 틀게 되어 자연스레 산만하게 흩어져 포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주춤하는 사이 이순신 기함에서 포환이 발사되었고 미처 진형을 갖추지 못한 일본 전함 수척이 피해를 입었다. 


보통 판옥선은 대포가 10개 정도 배치되지만 기함이나 거북선은 16-20여개의 대포를 장착했다. 앞에는 1개정도의 대포가 장착되지만 좌우 옆에는 5-10개의 함포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정쩡한 포위는 이순신 기함의 함포에 좋은 타켓이 되었고 조선 판옥선 1척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일본 수군은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만약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기함을 초기에 제압했더라면 조선 수군은 뿔뿔히 흩어져 달아났을 것이다. 멀리서 이순신 기함이 싸우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조선 수군들이 기함의 선전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하나 둘 돌진, 전투에 참여한다. 진열이 무너지고 적과 아군이 섞이어 조선 수군의 장기인 함포전으로 전개되지 못했고 마침내 장대한 판옥선의 장점을 살린 죽기살기식의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일본 수군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해협이 좁아 전진할 수가 없었고 초기 이순신 기함에 공격당한 십수척이 서서히 침몰하면서 진로를 방해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길이28m, 폭이 8m이상 되는 거선이 좁은 해협에서 불타거나 침몰하니 뒤에 있는 일본수군이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마음 대로 거둘 수가 없었다. 12시경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 1시를 지나 물살의 방향이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바뀌면서 일본군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썰물이 최고조인 오후 4시경에 이르러 일본 전함의 피해는 더욱 심해지고 마침내 일본 수군은 퇴각한다. 본래 일본 수군은 울돌목 돌기가 승부의 관건으로 보았고 조선 수군은 일자진을 형성, 울돌목을 돌다 적선을 집중 포격으로 공격하고자 했으나 각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은 기대했던 함포전을 쓰지 못했지만 죽기살기식으로 명량해협을 지켜냈다. 적선 32척이 완전 침몰되고 100여척이 피해를 입은데 반해 조선수군 전함은 1척도 파괴되지 않는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 우여곡절로 승리한 이순신의 명량해전을 역사가들은 천행이라고 적고 있다. 이 승부로 일본은 수군을 통한 서해 진출을 포기하고 이순신은 조선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비봉춘추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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