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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의 명인

2016.07.1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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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의 명인

정 목 일

 

사람들은 일생 동안 몇 번의 신명을 뿜어 낼 수 있을까. 신명이야말로 삶의 꽃이요, 생명의 환희가 아닐 수 없다. 신명은 겨울의 대지를 깨우는 봄비이며, 삶에서 피어난 꽃이 아닌가.

1987년 여름 어느 날, 산등성이에 있는 밀양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징·꽹과리·장고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섯 분의 노인이 사물놀이에 빠져 타악기를 치고 있었다. 칠순 노인들이 제각기 타악기를 두들겨 대는 모습은, 마치 장정들이 도끼로 장작개비를 쪼개듯 솟구치는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흥에서 뿜어 오르는 신명이었다. 얼굴은 불그스름히 물들었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노인들이 펼치는 타악기의 신명의 한가운데, 사물놀이판 한가운데,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다른 노인들은 이미 몇 번이나 만나고 인사도 나눈 분들이나, 여든도 더 돼 보이는 이 노인만은 처음 보는 분이었다. 상쇠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물놀이의 경지가 얼마나 범상한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꽹과리를 든 김상용 옹, 북을 든 하보경 옹, 장고를 맨 김타업 옹은 칠순을 넘긴 노인들로서 밀양백중놀이의 인간문화재들이며, 우리나라 타악기의 명인들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북을 든 정상중 옹 역시 뒤지지 않는 솜씨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런 명인들을 지휘하고 있는 처음 보는 노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자그마한 체구에 빡빡 깎은 머리, 구부정한 자세의 이 노인은 모시 두루마기 차림으로 상쇠를 들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춤추듯 장단을 치고 있었다. 아침 햇빛을 받고 이제 막 벌어진 호박꽃 같은 웃음이 얼굴 전체에 넘쳤다. 노인은 신명의 절정에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흥에 겨워 벌어진 입술 이 달싹달싹 움직이고 있었다. 간혹 <아아아아아아>자신도 모르게 신명의 중얼거림을 토해 냈다.

노인의 상쇠가 부르면, 사물소리가 일제히 달려오고……. 그는 상쇠로 소리를 부르면서 산과 강물을 불러오고 있었다. 산이 우르르 달려오고 강이 춤추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상쇠로 바람과 꽃향기와 새소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얼굴 가득히 번지는 웃음, 그는 알았다는 듯 응답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상쇠를 치고 있었다.

일흔이 넘은 노인들은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맘껏 풀기라도 한 듯, 이런 신바람을 일생에 한번만이라도 꼭 피워 볼 수 없을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제야 한바탕 어울려서 마지막으로 피는 복사꽃인 양 흐드러질 대로 피어서 도취경 속에 빠져 버린 듯했다. 꿈에 취한 듯 흔들거리는 노인의 어깨, 발놀림에 뚝뚝 떨어지는 신명의 여운이 짜르르 전해 오고 있었다. 노인은 하나의 가락을 이루기 위해서, 어쩌면 이 순간에 일생에 처음 한바탕 멋들어지고 까무러치게 놀기 위해서, 기다려 온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신명을 풀지 못해 한이 맺힌 노인이 오늘에야 비로소 함께 어울릴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나,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환희를 가락으로 펼쳐 주고 있었다.

그는 상쇠로 한국의 넋을 부르고 있었다. 꽹과리··장고소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논두렁이 일어나 춤을 추며 노인에게로 다가가고, 소나무도 뒷짐을 진 채 가락에 맞춰 다가오고 있었다. 학이 날아오고 장끼가 솔밭 위로 나지막이 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사물놀이 명인들인 인간문화재들과 신명의 향연을 벌인 노인은 김삼출 옹이었다. 밀양군 단양면 법흥리 상봉 마을에 사는 여든 다섯세의 촌로였다. 그는 16세 때부터 농악놀이를 익히기 시작했다. 자신의 출생지 법흥면에서 농악대를 창설하여 농악놀이에 빠지곤 했다. 그는 농사꾼으로 일생을 보냈지만, 언제나 농악놀이에 취해 있었다. 일제시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따라 농악놀이가 금지되었다. 김삼출은 산, , 집 마당에서 혼자 상쇠를 들고 치면서 놀았다. 심심할 적이나 외롭거나 슬프거나 기쁠 때도 혼자 상쇠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산등성이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강물과 함께 상쇠를 치고 달을 보면서 상쇠를 쳤다. 머리맡에는 하얀 옥양목 덮개 속에 상쇠를 넣어두고 잠을 잤다. 어느새 팔순이 되었고, 노인에게는 하나의 절실한 소망이 생겼다.

농악놀이 패들과 만나서 제대로 한 번 놀아보고 죽어야만 여한이 없을 듯 했다. 노인은 어느 날, 마을 이장을 찾아가서 간청했다. 이장은 밀양시내에 백중놀이 전수회관이 있고, 사물놀이 명인들이 후진을 가르치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마을 이장의 주선으로 타악기의 명인들과의 공연이 이뤄지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백중놀이의 인간문화재인 하보경, 김상용, 김타업 옹은 우리나라 최고의 타악기 명인들이었다. 혼자서 상쇠를 익힌 김삼출 옹과의 한바탕 공연은 그의 소원풀이 의식으로 받아들여진 한 판이었으나, 뜻밖에도 세상 천지에 처음 느끼는 도취의 공연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휘몰이 가락 속에 노인들이 치는 타악기의 신명 속으로 정신이 아물아물하게 젖어갈 때쯤, 어깨춤도 잠시 망각 상태가 되고, 공도 잊고 망연자실한 가운데 소리의 신명과 깨달음 꽃이 피고 지는 듯 했다.

숨이 막힌 듯 멈춘 듯, 그냥 신들린 듯한 순간이 지나고 절정의 신명에서 깨어나 마무리를 하면서 이 놀라운 놀이판은 대단원의 막의 내렸다. 타악기의 명인들이라고 한들 친순, 팔순 노인들이 징, 장고, 상쇠를 들고 심신의 정열과 열중을 보여준 몰아지경의 도취 광경은 여느 공연에서도 보지 못했던 신명과 장면의 연출이었다. 상쇠가 멎고 공연이 끝나자, 노인들은 흥감에 젖어 모두 엉켜 얼싸안고 땀과 환희에 젖은 얼굴을 맞대며 가슴의 전율과 감동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나로선 일찍이 이런 아름답고 감동적인 공연을 보지 못하였다.

김삼출 옹의 상쇠가락 일품은 빼기장단에 있었다. 4박자 중 한 박자를 생략함으로써 한껏 멋을 살리는 가락이었다.

상쇠를 잡고 첫 장단에 들어가면 모두가 척 화합하는 맛이 뒤따라야 되는 게야.’

가락으로 물을 때, “흥과 멋의 경지가 한데 어울려 달아올라야만 비로소 하나의 가락으로 흐른다.”고 했다. 노인이 빼기장단을 치며 신명에 젖을 때, 채를 공중으로 높이 던져 올렸다. 채는 천정에 닿을 듯 올라가선 노인이 뒤로 내민 손에 내려앉았다. 순간의 긴장이 관중의 숨을 멈추게 했다. 침묵이 흘렀다. 가락을 멈춘 생략법의 상쇠가 신선한 감동으로 번져 오고 있었다. 가락 하나에 노인의 85년 삶이 지나가고, 찰나와 영겁이 교차되고 있었다. 노인이 치는 상쇠 소리 속에 삶의 맥박, 정정한 생명의 힘살이 뻗어 있었다. 이 가락의 힘살은 여든다섯 해 평생을 살아온 희로애락의 무늬일 것 같았다.

내 생애에 한 번이라도 가락에 맞춰 쇠를 치고 싶은 게 소망이었어.’

노인은 잠잘 때도 머리 위에 상쇠를 두고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꿈에서조차 이 상쇠를 들고 한바탕 놀아 보길 소원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상쇠가 울리고 있었다.

농사지으며 가락이나 치면서 살았지. 한번 쇠를 신나게 쳐보는 게 소망일 따름이지.’

노인의 소망은 상쇠를 들고서 어떻게 한번 놀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명 속에 살았으니 후회도 없는 일생이었다고 했다. 아직도 남은 욕심이 있다면, 생애에 단 한 번이라도 가락에 맞춰 쇠를 치고 싶은 것이었다.

오늘, 충분하게 신명을 풀었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끔 마음속에 새겨 놓은 타악기의 명인을 떠올릴 때마다, 김삼출 옹의 일생과 신명과 가락을 생각해 보곤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은 어떤 가락으로 흘러가는가. 그 노인이야말로, 일생을 통해 신명의 가락을 완성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일생 중 한 번이라도 이 노인처럼 신명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김삼출 옹은 인간문화재도 아니요, 평생 동안 산골에서 농사꾼으로 살아왔지만, ‘상쇠라는 악기로 산과 들판과 강물을 바라보며 무수한 대화를 나누며 삶을 살았다. 운 좋게 평생에 한 번 김삼출 옹의 신들린 상쇠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감동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 무명의 달인은 아무도 모르게 상쇠를 안고 일생을 마쳤으리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명 속에 삶을 몰아넣는 일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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