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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水晶)의 집 / 정목일

2014.05.06 19:29

귀담 Views:2698

책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수필 하나 소개 합니다.

1996년 현대문학 5월호에 실린 목향 정목일 선배의 글입니다.

마치 목향을 만난것 처럼 반가워 차근차근 끝까지 읽었습니다.

요즘 집정리 하면서 오래된 책들을 버릴려고 젖혀 두었던 곳에서 발견한

선배의 글이라 다시 내 서재의 한 곳을 차지하게 된 수필입니다.

더구나 본 수필은 우리가 고등학교 재학시 많이 읽었던 그 유명한 수필가 <금아 피천득>과

<목향 정목일>과의 일화가 서술되어 있으며,  금아선생 댁을 방문하고 느낀 소회를 청순한 필치로

쓴 목향의 모습도 참 아름답게 보이는 그런 수필입니다.

한국 수필의 전통이 계승되는 그런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평생 詩文學 外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목향을 선배로 모신 덕분에 만년에 수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합니다.

동문 여러분과 함께  한국수필 大家의 모습을 감상해 봅시다.


지금부터 17년전의 목향의 글입니다.



수정의 집

                                                  정목일



<수정(水晶)의 집 >이라 부르고 싶은 그 집엔  84세의 소년이 살고 있었다.

언젠가 수필가 금아(琴兒) 피천득선생 댁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마산에 살고 있어서 쉽지 않았지만 그보다 금아선생 앞에 나서는 것이 두러웠다.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수필도 쓰지 못한 까닭에 금아 선생을 찿아 뵙는다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금아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 불현듯 한번 찿아가 뵈어야지 하는 생각을 가졌다.

금아 선생의 서재와 침실 풍경이 궁금하기만 했다.


어느 해 가을 . [현대문학]지 출신 수필가들의 모임에서 합동 수필집을 내고선,

수필가 몇몇 분을 초빙하여 조촐한 자축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금아선생을 모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피력하였더니,

모두들 이런 자리엔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대답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금아선생께서 모임에 나오셔서 참석자들을 기쁘게 해 주셨다.


그날, 금아 선생 말씀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말씀 중 잊을 수 없는 것은

<정목일과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어려울 것 같아 나왔다>는 말씀과

저서에 서명을 하여 가져왔다는 말씀은 가슴으로 강한 전류가 되어 짜릿하게 파고 들었다.

이름 조차 모를거라고 생각했는데 금아 선생께서 내 이름을 말할 때 감격을,

<한번 만나고 싶어 서명한 저서를 가져왔다>는 말씀엔 부끄러움을 느꼈다.

진작 찿아뵙지 못한 무례(無禮)에 얼굴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금아 선생 댁 부근에 와서 전화로 위치를 여쭤보았다.

금아 선생 목소리는 맑고 낭랑하여 금방 울린 종소리처럼 들렸다.

아파트였지만 앞뒤 정원에 몇 십년 수령의 나무들이 황금빛 가을 깃발을 게양하고 있었다.

금아 선생께서 환히 웃으시며 맞아 주었다.

거실엔 앉은뱅이 책상이 놓여 있었고 몇권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창 밖으로 나무들이 보이고 벽면에 서가와 그 위로 액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천진스런 어린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네개의 액자 속에 들어 있었는데, 금아 선생이

<친-외손자, 손녀들이지>라고 말씀하섰다. 또 한쪽엔 여배우 <잉그릿드 버그만>의

흑백사진 두 개가 서가 위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순하기만 한 20대의 것은 화가 천경자 씨가 애써 구해주었다고 하셨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도산 안창호의 사진액자가 있었고,

서양의 저명한 시인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책이나 신문에서 오려내어 액자 속에 넣은 것이 대부분인 듯싶었고

손바닥만한 것에서부터 5호정도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셰익스피어- 블레이크-워즈워스-바이런-테니슨-예이츠의 사진이 있었고,

동양시인으론 두보와 도연명이 있었다.

왼쪽에 늙어서 타계한 시인들의 사진이, 오른쪽엔 요절한 시인들의 사진이 배치돼 있었다.

금아 선생은 거실 벽면을 좋아하는 시인과 인물들로 채워놓고 시공을 초월한 영적교류와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알았다.

벽면의 사진, 액자 밑엔 말린 장미-튤립-안개꽃이 종이에 싸여 붙어 있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던 사람들과 은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84세의 고독한 문인 피천득 선생의 삶이 꽃향기로 베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인기가수와 배우의 사진밑에 꽃을 붙여놓았던 여중학생시절의 딸의 방이 떠올랐다.

" 늙은이의 방이니 침실을 보아도 괜찮을 거요" 금아 선생은 나를 침실로 이끌었다.

침대가 있고,의지에 큰 여자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그리고 음악과 영상을 즐길 수 있게

오디오와 비디오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평소에 셰익스피어 작품을 보는 게 취미이고 가끔 음악을 들으면서 지내신다는 것이었다.

<  저 인형이 내 딸이지---    > 

금아 선생이 의자에 놓인 인형을 가르키며 웃으셨다.

딸 서영이 가지고 놀던 인형인데, 이젠 < 양딸 >로 삼아 곁에 두고 예기 상대로 삼고 있다는것이다.

사철마다 인형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 주면서

서영이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잠들 때면 인형을 가슴에 안고 멀리 영국에 있는 딸 서영이를 그리며 잠든다고 하셨다.

<서영>은 금아 선생 수필에 자주 나오는 인물이어서 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독자들은 잘 알고 있다.

인형을 안고 잠드는 84세의 소년이 살고 있는 집은 동화 속의 집이었다.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수정으로 만든 집일 것만 같았다.

몸은 비록 늙어갔어도 마음만은 언제나 소년이어서  인형과 대화하며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글이 곧 사람이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작가의 삶과 작품과는 너무나 다른 면을

많이 보곤 했는데, 금아 선생 댁을 방문하고 나서 삶과 글이 더욱 향기롭다는 것을 느낀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난처럼 날렵하며 연적처럼 단아하다.

삶이 곧 난(蘭)과 같은 시(詩)가되고 학(鶴)과 같은 수필이 된 금아 선생.

수필을 발표하지 않은 지가 20여 년쯤 돼도 갈수록 향기가 나고 더 그리워져

찿아 읽고 싶은 글을 쓴 금아 선생.

마음 속에 맑은 옹달샘이 있어서 티 하나 묻지 않은 영혼으로

진실과 감동의 샘물을 선물해 주셨기 때문이다.


84세의 소년이 살고 있는 수정의 집.


물질만능의 시대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꿈과 인정.

고결한 인격으로 된 보물성 같은 그 집을 나오면서 나는 몇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작별인사를 했다.

(수필가)






 본 수필을 읽어 내려 가면서 따뜻한 사랑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전통의 맥은 이토록 아름답게 이루어지구나.

스승은 자신의  진면목을 구김없이 제자에게 보여주면서 자기의 참모습이 언젠가

아끼던 제자로 부터 수필의 질료가 되길  소망했을까.

사람 따로 글 따로 노는 세태에 <작가의 참 모습>을 대할 수 있어 한량없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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