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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의 <차 와 난초 >

2013.05.1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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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의 < 차와 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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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초 꽃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달은 귀한 벗이다. 소리 없이 먼 길을 와서 은근한 얼굴로 다가온다.
달이 찾아오기까지 쉴 새 없이 궤도를 돌아 왔건만,
마음속에 달빛을 맞을 맑은 공간이 없어 영접하지 못하는 건 아쉬운 노릇이다.
마음에 달빛이 내릴 수 있는 사색의 마당이 없어 달과 대화할 수가 없다.

달은 말하지 않고 영감으로 닿아온다.
커다란 눈동자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얘기한다.
은은한 눈맞춤으로 공감 속에 손을 맞잡게 한다.
우리는 어느새 휘황한 전등불 속에서 밤하늘을 잊어버렸다.
어둠이 지닌 신비로운 세상을 망각해버렸다.
어둠 속에서 문득 한 별과 눈맞춤하는 순간이 몇 만 광년을 거쳐서 이뤄진 만남이란 걸 알지 못한다.
그 별빛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몇 만 광년 전에 출발하여 우주 공간을 거쳐
이 순간 내 동공으로 들어온 것이다. 기적 같은 순간이지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난초 꽃을 보는 것도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귀한 순간이다.
‘바깥에 대나무가 있으면 방안에 난초가 없을 수 없다’는 소리는
남도 선비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겨울동안 방안에 산수화(山水畵)나 화조도(花鳥圖) 병풍을 펼쳐놓고
자연이 없는 무료를 달랜다고 해도 그림에 불과하다.
이보다 추위에도 본색을 잃지 않는 난초가 고마운 벗이 돼준다.

차 한 잔을 놓고서 난초를 바라본다.
꽃 필 무렵의 향기도 그윽하지만, 청초하고 단아한 몇 가닥 잎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공중으로 치켜 올라간 몇 가닥 난초 잎들,
허공 속으로 뻗어나간 유려한 곡선미(曲線美)는 기막혀서 말을 잃게 한다.

우리 산 능선의 아름다움을 몇 가닥 난초 잎의 선율 속에 응축시켜 놓은 게 아닐까.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게 한없이 부드럽고 온유한 선(線)을 보여주는 산 능선-.
첩첩한 산들이 기러기 날개 짓으로 날아오는 난초 잎들,
우리 산 능선의 부드러움과 은근한 곡선을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다.
난초 한 잎씩이 산의 만년 침묵과 마음 선율을 간직한 채 영원으로 한없이 뻗어나간 자태를 본다.

난초 잎들은 간결하다.
난초 한 잎으로 거대하고 깊은 산의 영혼과 아름다움을 뭉뚱그려 허공 속에 척 그려놓았는가.
볼수록 기가 막힌다. 산의 명상과 영원을 어떻게 한 줄의 살아있는 곡선으로 그어놓았는가.
눈이 삼삼하게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임의 눈매 같고, 휘늘어진 허리 곡선 같다.
옛 선비들이 난초를 사랑한 까닭은 일 년 내내 푸른빛을 잃지 않는 절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청초, 우아, 고결하기 때문이 아닌가.

난초 잎은 곡선의 미(美)만 있는 게 아니다.
첫 눈으로 보면 일직선으로 늘어진 모습이다.
가늘게 공중으로 뻗어나간 잎줄기가 준수하다고 할까,
미려한 직선의 약동을 보여준다.
한참동안 바라보는 가운데서 휘어지며 구부러지면서 뻗은 곡선미기 보여서 더 묘미를 느끼게 한다.

직선 속에 넘실대는 곡선, 곡선 속에 보이는 시원한 직선이 있다.
사철 변하지 않는 절조 가운데,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품고 있다.
간결미 속에 풍만함이 있고, 가냘픔 속에 칼보다 무서운 지조가 엿보인다.

난초를 보면서 강물 소릴 듣는다.
난초 잎은 천 년 만 년 흘러가는 강물의 허리 같다.
겨울 동안 난초만을 바라보아도 심심치 않은 것은 간소한 모습 속에 깃든 함축과 여운 때문이 아닐까.
산의 만년 명상으로 빚은 선율, 강이 만년을 흐르며 얻은 유선(流線)의 미를 간직하고 있다.
방안에서 난초를 보면서 산과 강의 오묘한 선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단출하여서 더 그리움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비법을 난초 잎이 품고 있다.
난초 잎에 흐르는 빛깔이 산의 숨결이며, 강물의 물살이다.
그 빛깔을 영원의 빛깔이라 해도 좋으리라.
선비들은 한결 같은 난초의 빛깔과 태도에 감탄하며 삶과 일생을 배우고 따르고자 했다.

난초를 보면 대금소리가 들려온다.
난초의 선형(線型)은 대금산조의 선율이 아닐까 한다.
대금의 끝자락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달빛에 흔들리는 듯이 부는 대금산조 가락은
난초의 유현한 곡선이 아닐까.
어디에도 막힘없이 영원의 세계로 흘러가는 길목과 그리움을 전해주는
대금산조의 음율과 난초의 곡선은 닮은 데가 있다.

난초를 보면 혼자서라도 차를 마시고 싶어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고 많은 대화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향기로지는 것은 욕심으로부터 벗어난 듯 초탈한 난초의 자태 때문이리라.
무욕의 경지에서 한 가닥씩  뽑아 올린 불과 대여섯 가닥으로도 한 세계를 이뤄놓는다.
일체의 수사와 설명과 묘사를 버리고 간명, 함축, 절제로 고요와 고결과 명상의 세계를 구축해 놓았다.
욕심을 다 채우려는 것들과는 그 격이 다르다.

난초 꽃이 피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어릴 적에 우리 집 바깥에 ‘난향십리(蘭香十里)’라는 화제(畵題)의 난초도(蘭草圖)가 붙어 있었다.
과장법도 심하다고 여겼더니, 그 향기는 지금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난초 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몸을 숨긴 채 암향(暗香)을 풍긴다.
난초 꽃이 피면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은 것은 난향을 마시며 난초 갗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이다.

찬 한 잔을 앞에 두고, 난초를 바라본다.
만년 산과 만년 강물이 나를 쳐다본다.
난초의 자태 속엔 대금산조의 음률이 있고,
산 너머 영원으로 흘러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울리는 종소리가 있다.
장구를 매고 휘몰이 장단에 빠진 여인의 허리 곡선이 있고, 판소리 한 대목이 있다.

난초와 더불어 차 한 잔을 나누는 것은 영원과 마주 앉는 무욕의 시간이고,
정갈한 마음의 공간이자, 삶의 깨달음이 아닌가 한다.
난초 꽃이 피면 혼자라도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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