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8 21:44
신록기(新綠期) / 鄭 木 日
우리나라 사월 중순부터 오월 중순까지 한 달쯤의 신록기(新綠期)엔 그 어떤 꽃들도 빛날 순 없다.
색채나 빛깔에 신비, 장엄, 경이라는 왕관을 씌운다면 꽃이 아닌 신록에만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장미, 모란, 국화, 튤립 등은 화려, 우아, 매혹, 황홀이란 공주가 쓰는 관쯤이면 될 것이다. 신록은 신이 낸 빛깔이어서 스스로 햇빛을 끌어당기고 향유를 바른다. 신록은 탄생의 빛깔이다. 볼 때마다 빛깔들이 꿈틀거리고 새로워진다.
산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선 어디로 가나 숲을 볼 수 있다. 산엔 소나무가 가장 많지만, 수많은 나무들이 어울려 산다. 외국처럼 특정한 나무들로만 숲을 이루고 있지 않아서 봄·가을엔 색채의 향연 속에 빠지게 만든다. 수목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신록과 단풍의 색채가 다양하고 아름답기가 세계에서도 으뜸이 아닐까 한다.
신록기의 산과 숲에선 수백의 초록이 한데 넘실거린다. 엇비슷하면서도 다른 미묘하고 섬세한 초록 빛깔들은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나무들의 수효보다 많을 듯하다. 한 나무일 지라도 오래 된 잎과 새 잎의 빛깔이 다르다. 넓직한 잎, 좁직한 잎, 바늘잎의 빛깔이 서로 차이가 난다. 한 잎이라 할지라도 앞뒤의 빛깔이 사뭇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며 잎의 빛깔들이 반짝거린다. 새들도 오래 동안 말문을 닫고 지내다 신록 속에서 새로운 말들을 주고받는다. 신록기의 산과 들은 색채로 넘쳐나는 신명, 그 자체다.
청단풍은 푸르무레, 전나무 구상나무는 푸르스레, 산수유 생강나무는 푸르초롬, 느티나무는 푸릇푸릇, 참나무는 푸르딩딩, 소나무는 검푸레하다. 나무들은 금방 산부(産婦)의 몸에서 생겨난 빛깔들을 띄고 있다. 순산(順産)의 빛깔이라 할까. 갓난아기처럼 젖 내음을 풍기고 피부는 햇살에 비춰 보일 듯 맑고 여리다. 보드랍고 천진스러워 볼을 대고 입 맞추고 싶다.
초록 빛깔 속에도 강약(强弱)이 있고, 농담(濃淡)이 있다. 명암(明暗)이 있고 원근(遠近)이 있다. 나무들마다 빛깔들로 군락을 이뤄 둥글게 혹은 편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군락들이 뒤섞여서 녹색의 구름밭이 되고 파도가 된다.
신록기의 나무들을 보면 하나씩의 초록빛 분수가 되어 뿜어 오른다. 오래 동안 참았던 그리움을 맘껏 펼쳐내고 있다. 빛깔들은 하늘과 사방으로 평창하고 있다. 초록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다. 신록기의 시시각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초록 빛깔을 화가는 어떻게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바위산은 잘 그려낼 수 있지만,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신록기의 산과 들판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나무들도 있는 힘을 다하여 신록을 펼치지만, 햇빛과 바람과 기후- 천지 기운이 함께 힘을 합쳐 내는 생명의 광채를 인간의 능력으로 어떻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수백, 수천의 미묘한 초록 빛깔들을 어떻게 채색한단 말인가.
신록기엔 누가 천지 가득한 초록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보지 못했던 선(線)과 색채들의 영혼을 깨워서 축복과 찬미의 신비음(紳秘音)을 내는 것일까. 나무들은 자신들의 군락마다 다른 악기들을 들고 있다. 단색(單色)이 아닌 기기묘묘하고 무한 음역의 초록 악기들이 지휘자의 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신이 내는 오묘하고 깊은 선율이다. 황홀하고 청신한 신록의 대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신록기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신록을 통해서 세상은 다시 태어나고 새로워진다. 잎눈에서 초록의 빛깔들이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닐까.
인생의 신록기는 16~25 세쯤이 아닐까 한다. 이 시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꿈꾸는 때이다. 내 신록기는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되어 시련과 방황 속에 지나갔다. 그러나 가슴 속에 신록의 꿈만은 잃지 않았다.
신록기엔 내 몸에서도 잎눈이 피어나서 순결한 기운이 흐르는 듯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푸르러진다. 잎눈에서 막 벌레처럼 기어 나온 듯 움직이는 빛깔, 탄생의 거룩한 광채, 환희로 넘치는 생기발랄의 초록을 본다
신록이야말로 축복의 표정이요 찬미의 노래다. 꿈과 성장을 예비하는 은총의 기도이다. 우리에겐 이 신록기가 있어 마음을 순치시켜 주고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사계(四季)가 있고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특별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신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살아있음이 너무 행복하다. 신록기엔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하늘을 향해 마음껏 가슴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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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신록
오월은 16세 소녀같다.
희망에 눈부신 나무와 햇살에 행복한 꽃들이 춤을 춘다.
신록의 들판을 바라보면 마음엔 파란 호수가 생겨 출렁인다.
찰랑찰랑 노래하는 신록이여.
대지의 가쁜 숨결이 피어나는 산야로 나가자
신록의 기운을 마시고 젊은 그날로 돌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