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1 02:29
박 꽃
鄭 木 日
농촌의 가을밤은 풀벌레들의 연주로 시작된다. 맑게 비어있는 적막한 공간에 올올이 소리의 사방 연속무늬를 짜넣은 풀벌레들…. 풀벌레들이 펼치는 소리의 실타래 끝엔 몇 만 년 산의 명상이 달빛이 물들어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풀벌레소리…. 점점 깊어만 가는 달빛고요. 누군가 목관악기라도 불 듯한데 소슬바람만 벼 향기를 쓸고 가는 들녘에 희다못해 푸르초롬한 빛을 뿜어내는 박꽃이 눈에 띈다.
밤에는 모든 꽃들이 제 모습을 갖추고 말지만 박꽃만은 어둠 속에 그 자태를 드러낸다. 산등성이나 밭두렁 어느 곳이나 가리지 않고 자라는 박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꽃만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박꽃은 달밤에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다. 흰 모시옷차림의 여인이 반닫이 방문에 물든 달빛을 바라보며 님 생각에 빠져 있다. 저물 녘에 피어나 밤새도록 어둠 속에 흰 빛을 뿜고 있는 박꽃은 소박하나 청결해 보이고, 날렵하나 무슨 일에도 굽히지 않을 듯 강인해 보이고, 처연해 보이지만 의연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호박꽃이 황금빛 별을 닮은 낮의 꽃이라면, 박꽃은 달빛이 몸에 밴 밤의 꽃이다. 수수하기 이를 데 없으나 맑음과 고독으로 닦아낸 영혼이 어둠 속에서 빛을 뿜고 있다. 가을밤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박꽃을 보라. 오랜 그리움을 견디고 견뎌 한(恨)마저 삭여서 고요한 대금 산조 가락이 되어 님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그 맑은 눈물을…. 한국 여인의 은장도(銀粧刀)빛 순수의 넋을…. 어둠 속에 결연히 내뿜는 순백(純白)의 정결, 눈물어린 박꽃의 고백을.
박꽃은 이른 아침, 샘터에서 물을 길어온 여인네가 장독대에 단정히 꿇어앉아 상 위에 하얀 백자대접을 받쳐놓고 지성으로 기구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박꽃의 희디흰 빛깔은 고독속에 홀로 간직한 청순미와 함께 무섬증이 들도록 섬쩍하면서도 마음을 끄는 가련미를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꽃이 화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데 반해 박꽃만은 그런 느낌과는 달리 눈물과 비애미를 간직하고 있다. 남들이 모두 잠든 밤에 피어 있는 박꽃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머니나 누이를 생각하게 된다.
박꽃은 우리 겨레 마음의 텃밭에서 덩굴을 뻗어나가 가을들판에서 피어나고 있다. 박꽃의 순수 비애미를 함축한 강렬한 인상은 민족 정서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라. 박꽃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려온 그리움이 마침내 영글면 박이 열린다. 농가 울타리와 산비탈에 그리고 밭두렁에 주렁주렁 열리는 박은 가을의 풍요로움과 흥취를 돋워준다.
우리나라 산등성이의 곡선과 잘 어울리는 초가지붕의 곡선. 모나지 않고 보름달 같은 초가지붕 위에 하이얀 박덩이가 얹히고 빨간 고추가 널려 청명한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 풍경….
이는 그리운 옛 농촌의 가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농부는 가을에 박을 따 바가지를 만든다. 바가지는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사용해 온 생활 용구, 소박하고 은근한 정감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 겨레에게 바가지처럼 다양하게 쓰여진 용구도 없을 듯하다. 물과 곡식을 퍼내고 담는 그릇으로 제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탈을 만들어 생활의 흥취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우리 겨레의 마음에 소중한 모습으로 또한 정겨운 가을서정으로 자리잡고 있는 박꽃같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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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 귀담
고향을 떠나올 때 순이네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하얗게 피었던 박꽃
오늘 목향의 글 내 마음 흔듭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박꽃의 微笑를 생각합니다.
지금 시골엔 초가지붕도 하나 둘 그리움으로 사라지고
다시 고향을 찿아도 순이네 박꽃은
가을의 흰구름 속에서만 피고 집니다.
세월의 강물에 희미한 그림자만 미소 짖는데
보고 싶은 고향집엔
이젠 박꽃이 피지 않는 답니다.
우물가에 서서 순이네 하얀 박꽃을 보려
막무가내 달려가려 합니다.
그립고 그립던 하얀 박꽃을
머리 우에 피우면서 가려합니다.
순이 닮은 파란 박이
지붕에서 뛰어 내려
반겨 주려나
반겨 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