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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잉크

2014.04.04 18:11

목향 Views:4209

 

초록 잉크 

 

                   / 정목일    

                                      


  필통에 만년필, 볼펜 등이 십 여 개나 꽂혀있건만,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럴 때 당황스럽다.

내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내 주던 만년필과 볼펜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있음을 알았다.

자동차의 라디오 소리가 터널 속으로 들어서자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인터넷시대에 진입하자 벙어리로 변해버린 듯하다.

진공상태처럼 멍청해진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상 구석에 방치돼 있는 필통은 버림받은 모습이다.

망각 속에 놓여 있는 필통-. 그 속엔 연필, 지우개, 칼, 풀 통 등이 들어 있다.

인터넷에 자리를 물려주고 소외와 무관심 속에 유폐돼 있다. 


필통에 꽃을 꼽는다면 꽃병이 될 터이고, 보석을 담는다면 보석 통이 된다.

쓸모없는 것들만 모여 있다면 쓰레기통이나 다름없다.

일 년에 한두 번 손길 가는 필통일지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 창고가 아닌가.

만년필과 볼펜에 잉크가 말라버렸다는 것은 이미 용도폐기된 시점이 지났음을 뜻한다. 


필통 속에는 애용품이었던 파카, 몽블랑 만년필이 들어 있다.

파카 만년필은 결혼 혼수품이고, 몽블랑은 지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문단에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한 나는 만년필을 갖고 싶었다.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을 ‘결혼서약서’와 함께 다짐하고 싶었다.

만년필은 문학 일생을 향한 내 삶의 증표물이었다.

당시의 내 결의가 그런 방식으로 행해졌고, 만년필과 함께 일생을 보내길 원했다.


파카 만년필을 만져본다. 잉크를 넣어본 적이 언제인가.

이 만년필로 무슨 작품을 썼던 것인가.

초기 작품집, ‘남강부근의 겨울나무’와 ‘ 달빛 고요’를 내고서

책마다 그 만년필로 서명을 해서 우편으로 보내던 때를 상기한다.

나는 외출할 때 먼저 만년필이 양복 안주머니에 꽂혀있는가를 확인했다.

심장과 맞닿는 곳이다. 심장 박동이 느껴지곤 했다.

만년필과 함께 언제나 동행하리라 생각했다.

만년필은 생각의 초록 분수를 뿜어내 주는 내 삶의 동반자였다.


어느새 만년필, 볼펜의 펜촉들이 예민한 감성의 눈빛을 반짝이며 기다리던 필통이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가난했지만 문학이 있었기에 마음이 풍요했던 젊은 시절이 흘러갔음을 필통이 전해준다.

먼지가 앉은 만년필,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볼펜들은 이제 생기도 없고 생각도 고갈되고

치매에 걸려버린 듯 칙칙하다.


이제 나는 인터넷에다 글을 친다. ‘쓰는 것’에서 ‘치는 것’으로 바뀐 지 오래다.

누가 현대의 흐름을 막을 수 있나. 편리와 효용성이 떨어지면 무엇이든 폐기처분되고 만다.

인터넷은 삭제, 삽입, 편집이 자유롭고 자료 활용이 손쉬워 효율성이 있다.


아파트에 산지 20년이 넘었다. 인터넷으로 글을 쓴지도 10년이 넘었다.

나는 그동안 자연과 교감하는 글을 써온 것일까.

아파트에 살다보니, 어느새 빗소릴 잃어버렸다. 새소리와 벌레소릴 듣지 못한다.

바람의 체감을 못 느끼고, 달과 별을 만나지 못한다.

나무의 빛깔과 풀꽃 향기를 알지 못한다.  


지금도 연필로 원고지에 시를 쓰는 시인이 있긴 하다.

ㅈ 시인은 연필심이 생각을 타고 종이위에 사각거리며 옮겨지는 시를 쓴다.

청각을 통해 글을 쓰는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대부분이 인터넷에다 글을 친다. 필통이 소용없게 되었다.

문학의 상징물이었던 ‘붓’과 ‘펜’이 아무 짝에도 필요 없게 된지 오래다.

글 쓰는 사람에게 소중한 필수품인 필통이 쓰레기통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인터넷시대의 글쓰기는 화면을 보면서 자판을 치면 된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다.

또한 언제든지 휴대폰을 통해 문자를 보냄으로써 소통할 수도 있다.


편지 한 통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우체국에 가던 예전의 일은 까마득한 기억으로 사라졌다.

마음에 들지 않은 글자 한 자라도 있으면 반복하여 쓰고,

좋은 글씨를 보이려고 정성을 다 하던 육필편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람만의 개성과 정감이 어리고, 체취와 손의 감촉, 마음씨까지 보일 듯하던 글씨가

편리에 밀려 사라져버렸다.


통영에선 청마 유치환 시인이 사랑편지를 부치려 걸어가곤 했던 우체국을

‘청마우체국’이라고 개명하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길거리에 보이던 빨간 우체통은 점점 이용자가 줄어들어 정다운 편지 대신,

쓰레기들이 쌓이곤 하다가 하나씩 사라지게 되었다.

육필편지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유명한 문인들의 문학관에 가보면, 작가의 유품으로 육필원고와 만년필,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볼 수 있다.

문인에게 종이, 붓, 먹, 벼루는 벗이나 다름없었던 시절이 어느새 지나가고 말았다.

사람마다 다른 독특하고 개성적인 필적은 글쓴이의 성격과 마음까지 담아낸다.

인터넷시대는 글씨 자체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소통장치가 명료하고 신속, 보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육필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정취랄까, 표정의 교감대가 사라진 게  아쉽기만 하다.


구시대의 유물로 변한 필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만년필과 볼펜의 심에 잉크가 말랐다고, 내 사유와 느낌마저 마르게 할 순 없다.

내 마음속 만년필에 마르지 않는 감성의 초록 잉크를 듬뿍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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