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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白瓷)의 태깔
鄭 木 日

가끔 박물관에 가서 백자 항아리나 달빛 항아리를 보고, 달빛 속에 빠져서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곤 했다. 
백자는 화려하거나 눈부시지 않다. 대낮의 햇빛이 아니라 한밤중의 달빛이다.
담담하고 수수하다. 창호지 방문에 투영된 여명(黎明)의 빛깔, 깊은 산 중 한옥의 마당에 내려온 달빛이다.
눈부시지 않게 점점 깊어지는 빛깔이다. 달빛 속처럼 텅 비어 있어 섭섭하기도 하고,
누군가 여백(餘白) 속으로 걸어올 듯싶어 기다려지는 심정을 갖게 한다.
백자는 마음이 텅 비어 있어 고적감마저 든다. 달빛의 맑은 도취속이어서
대금산조 한 가락이 흘러올 듯 광막한 그리움을 펼쳐 놓았다.

백자는 마음의 정화(淨化)가 아닐까.
백설 속에 꽃망울을 피운 매화의 빛깔, 근심을 씻고 부정한 생각을 지우고
마음의 등불을 켠 백목련의 빛깔일 듯싶다.
한 점 탐욕도 없이 거짓이나 부정으로부터 벗어난 무욕(無慾)의 마음이다.

마음에 묻은 욕망이란 때를 벗겨내고, 성냄이란 얼룩을 지우고,
어리석음이란 먼지를 털어낼 수 있을까.
마음속 샘에서 분수를 뿜어내어 언제나 청결과 순백의 마음을 지닐 수 있게 할까.
마음 바탕에 평온과 순리의 미소를 띨 수 있을까.
어떤 유혹과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결백과 순수를 꺾이지 않게 할까.

백자의 태깔은 마음 연마(硏磨)의 표정이 아닐까.
한 점 티끌이나 먼지도 묻지 않은 결백의 삶을 추구한 기구이고 지극 정성의 빛깔이 아닐까.
백자 그릇이나 항아리에 달빛 충만 이외엔 비어있어서 한 쪽에다 난초나 국화 한 송이를 피워놓기도 했다.
고요와 텅 빈 공허 속에 난초나 국화 향기를 띄어 놓아서 맑은 그리움과 만나게 한다.

민족마다 도자기에 삼원색(三原色)을 비롯한 유채색(有彩色)으로 온갖 미의식(美意識)을 펼쳐내곤 했다.
우리 민족만은 어째서 고려시대 오백 년간 청자(靑瓷)만을, 조선시대 오백 년간엔 백자(白瓷)만 빚어온 것일까. 
순백색의 끝없는 탐구는 마음을 닦는 구도 행위였다.
우리 겨레는 생명 근원의 빛깔로써 백색을 찾아낸 것이며, 깨달음의 빛깔임을 터득한 것이다.
만 년 명상을 담고 있는 영원의 빛깔,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열리고 맑아지는 순백(純白)의 세계…….

백자의 태깔은 명상의 끝, 고요의 끝에 닿아있다.
마음의 선(善)에 있고, 텅 빈 허공에 있다. 마음을 비워야 한계가 없어지리라.
한계가 없어져야 마음에 새가 노래하고 달빛이 내릴 수 있다.

정결한 마음에 깃든 고요와 평온……. 백자는 빛이되 번쩍거리지 않고
은근하게, 마음이되 드러나지 않고 편안하게, 눈짓이되 부시지 않고 그윽하다.
흰옷을 입고 순백의 탐구에 오백 년을 매달린 것은 영원의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자는 순수 세계를 꿈꾸었던 민족의 마음 그릇이다. 백자는 도자기로 구현한 깨달음의 꽃이었다.
  순백은 순치의 색이요, 우주 근원의 색이 아닐까.
흰옷을 입고 백자를 보면서 일생을 살았던 조선시대의 사람들…….
태어날 때 흰옷을 입고, 죽어서 관에 들어갈 적에 흰옷을 입고 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백자를 보면서 영원 추구를 통해 체득한 깨달음의 빛깔이요, 진리의 빛깔임을 느낀다.
우리 민족이 오백 년간 흰 빛을 빚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깊고 정결한 마음의 경지를 얻었는가를 알듯 하다.
백자를 보면서 영원의 빛깔을 생각한다.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구원의 빛깔을 생각한다.
이 세상에 오백 년간 백자를 탐구하고 그 빛깔에 도취했던 민족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보다 깊은 영원의 추구가 어디 있을까, 이보다 맑은 순수의 탐구가 또 있을까.
백자는 우리 민족이 남긴 영원의 마음 사리(舍利)인 듯싶다.
생활이 어렵고 전란이 있었지만 백자의 빛깔 속에서 인정을 나누고
참되게 살아가려 했던 겨레의 마음과 모습이 보일 듯하다. 

백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달빛이 쌓이고, 소리 없이 흰 눈이 내리는 듯하다.
마음에 묻은 티끌이 지워지고 근심이 사라진다. 저절로 맑고 깊어져 담백해진다.
어디서 난향(蘭香)과 국향(菊香)이 풍겨오는 듯하다.

계간 <동리목월>2013년 가을호 정목일 집중조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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