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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를 그리며

2014.05.2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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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를 그리며/정목일(수필가)

 

사군자를 배우러 다니는 미술학도 K와 얘기를 나누다가 엉뚱한 데로 방향이 가고 말았다. 예술이란 기존의 질서와 방식, 이를테면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새로운 질서와 방식을 찾아내는 창조작업 일텐데, 수 천 년간 답습해오는 기법에 따라 사군자만 그리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사군자를 배우려는 학도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사군자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릴 했는가 하고 자책했다. 사군자는 수 천 년간 동양에서 답습하여 계승되고 있는 회화의 한 장르이며, 그럴 만한 깊이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술은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쪽과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창조해나가는 쪽 크게 두 가지로 윤곽이 잡혀있다. 어느 쪽이 좋고 가치 있다고 재단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동양의 선()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요.”

K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엉뚱한 말을 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이른바 사군자 그리기에 대하여 케케묵은 소재와 정신세계에 얽매여 있음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 동안 난을 치고 대나무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세계의 개척과 창조가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고, 전통예술의 계승도 문화유산의 보존과 예술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다.

 

옛 선비들은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으며,이것을 인격 수양의 중요한 방편으로 여기기도 했다. 사군자를 그리는 행위는 자연에서 인간을 보며,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세계의 추구를 뜻한다.

선비들이 혼자 즐기는 풍류 중에서 거문고가 있다. 거문고를 금()이라고 하는 것은 군자가 바른 것을 지켜서 스스로 금()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거문고 소리는 바른 뜻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서 사악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 군자들은 거문고를 타면서 항상 조심하고 스스로 느껴 사악한 것과 금할 것을 조절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공자가 사양(師襄)이라는 사람에게 거문고 타는 법을 배웠다. 거문고를 배우는 것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史記孔子 世家) 또 음악에

 

대한 태도를 말할 때, “군자와 소인이 다른 것은 군자는 악도(樂道)를 얻으려는 것이고, 소인은 그 악음(樂音)을 욕심내는 것이다.”(禮記樂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옛 선비들이 거문고를 즐기는 뜻은 단순한 기예의 연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도를 배우고 터득하는 데 있었다. 또 자연 속에서 무한한 악도(樂道)를 얻으려 했다.

 

靑山不墨萬古屛

流水無絃千年琴

청산은 먹으로 그리지 않아도 만고의 병풍이요

흐르는 물은 줄이 없어도 천년의 거문고일세

 

 

거문고를 연주하는 목적은 기예의 연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연마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며, 곧 무현금(無絃琴)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한 미술학도 앞에서 상식적인 예술론을 펼치므로 해서 소인배가 돼버린 기분에 젖으면서, 태도를 바꾸어 욕심 내지 말고 한 걸음씩 나가라고 말해주었다.

두 달쯤 지난 후에 우연히 K를 만나, “사군자 공부가 잘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정색을 하며 욕심을 버려야 난초 잎이 그려진다는 대답이었다. 난초 잎 하나를 그리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고 했다. 한 줄의 난초 잎이 어떻게 마음속으로부터 그어지는가. 허공으로 뻗어나가 가장 날렵하면서도 변함 없고,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선이 되는가. 바라만 보아도 온화하고 그리움이 넘치는 산 능선 같은 난초의 선, 우리 땅을 적시며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우리 강물의 유선(流線) 같은 선, 무현금의 가락 같은 선을 한 줄씩의 난초 잎으로 그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선()의 경지요, ()의 세계이다. 그래서 난초만을 평생 동안 그린다고 해도, 도달하기가 어려운 경지며 세계인 것이다. 예술가가 되려는 것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대나무를 잘 그린다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와 같은 삶과 정신을 갖고자 한다. 매화를 잘 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일생에서 매화향기가 풍기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술과 삶과 인격의 삼위일체를 추구하는 것이 사군자의 세계라 할 것이다.

 

물질만능과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이 시대에 아직도 사군자의 세계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세상에, 사군자의 정신을 삶 속에 그대로 계승하고 추구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군자를 그리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기만의 새로운 발견과 탐구도 아닐 뿐더러, 오랜 답습의 행위가 아닌가. 변화와 속도의 이 시대에, 수 천 년간 답습해온 주제와 소재를 붙들고 매달려 있다는 것 자체가 낡은 관념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도 하다.

그래도, 나는 가끔 사군자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남이야 어떤 소릴 하든 하얀 화선지를 펴놓고 먹을 갈아 난을 치고 싶다. 척척 단숨에 난초 잎 한 가닥을 허공에 띄워올리고 싶다. 묵은 가지에 봄 입김이 서린 매화꽃 송이를 방울방울 달아놓고 싶다. 찬 서리 속에도 우아한 자태와 향기를 드러내는 국화를 피워내고 싶다. 변함없이 곧고 푸른 대나무를 쭉쭉 하늘 높이 치켜세우고 싶다.

 

 

살아갈수록 진부하고 낡은 듯한 세계가 그립고 아쉽다. 물질이 풍요할수록 정신의 빈곤과 황폐를 느끼게 한다. 인공과 새로움의 추구 속에도 자연과 불변의 아름다움을 사군자에서 찾아보고 싶다.

 

 

난초 잎을 수만 번 그어보면 우리 산 능선의 선형을 알게 될까. 강물의 유유한 선율을 터득하게 될까. 허공으로 뻗은 단정한 선 끝으로 마음을 뻗치면 영원의 길목으로 갈 수 있을까. 고려 청자, 조선 백자의 오묘한 선형을 짐작할 수 있고, 난초 잎에 닿아 있는 우리 자연의 고유하고 내밀한 마음의 선들을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댓잎을 수 만 번 쳐보면 우리 산야에 자생하는 나무의 잎들과 만날 수 있을까. 달밤에 듣는 댓잎소리와 대금산조를 들을 수 있을까. 어쩌면 칼보다 더 푸르러 죽음 앞에도 의연한 기개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매화를 수 만 번 쳐보면 영혼에서 나는 매화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 국화를 수 만 번 쳐보면 향기 나는 삶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사군자는 케케묵은 세계일 수만은 없다. 수 천 년간 답습해온 어떤 까닭과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는 무한의 깊이와 의미가 잠재해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지향보다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어떤 삶을 지향할 것인가를 사군자가 가르쳐주고 있다.

 

 

사군자는 동양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이상형의 인간, 군자(君子)의 삶과 도()를 말해주는 것으로 언제나 동양정신으로 맥맥히 계승될 것이다. K를 다시 만나면 사군자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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